친구와의 동행
지리산,
산은 친구를 부른다.
긴 산행을 함께할 동행을 부르고 우정을 살찌운다.
친구는 산에서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산행코스와 오가는 차편예약은 내게 맡겼다. 가볍게(?) 당일코스로 가는 일정을 잡기로 했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당일로 천왕봉에 오르는 코스는 중산리와 백무동을 통해 가는 길로 압축되었다. 교통편과 우리의 체력을 고려해 보면 백무동으로 들어가 백무동으로 나오는 길이 그나마 만만하게 느껴졌다. 왕복 14.7km 보통 7-8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12-3시간쯤 걸린다 생각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설렌다.
친구는 산행에서의 백미는 역시 산공기 마시며 고기 구워 먹고 라면 끓여 먹는 맛이라며 80L 배낭을 가득 채웠다. 나는 내 몸 하나 챙기려 최대한 가볍게 패킹을 했는데, 친구는 함께할 시간을 위해 20kg을 짊어진다.
백무동에 도착하니 새벽 3시 40분, 깜깜한 새벽길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쫓아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너무 이른 새벽인지 아님 잠이 덜 깨인 건지 벌레소리조차 안 들린다. 긴 산행에 20kg 무게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연신 괜찮다고 하는 친구의 짐을 뺏다시피 해서 조금이라도 나눠본다. 그래도 차이가 많이 난다.
좀 뒤처지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운 좋게 산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슬며시 바람이 불어와 조용했던 숲이 바스락거리며 뒤척인다. 나무숲 사이를 헤엄치며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 선율이 되어 울려 퍼진다. 숨조차 내쉬기 조심스럽다. 바싹 야윈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서 살포시 떨어져 등장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오케스트라 발레공연이다. 검푸르스름 하늘배경 위로 검은 드레스의 무용수들이 군무를 춘다. 그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며 우아하게 빙그르 돌면서 저 멀리 다른 이와 살짝 서로 부딪쳤다가는 다시 훌쩍 날아간다. 이렇게 이리저리 바람을 타고 춤추는 낙엽들의 공연이 한동안 지속된다. 이들이 살짝 바시락 스치며 두드리는 소리는 가벼우면서도 묘하게 맑고 아름답다. 찌르르 쪽쪽 새벽잠 없는 한 마리 새가 포로록 날라든다. 숲의 공연이다. 사방 가득했던 검은빛이 이제 은은한 오렌지빛 단풍을 시작으로 서서히 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숲이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친구는 해가 뜨면서 불어오는 바람, 해풍이란다.
이제부턴 우리의 공연이 시작된다.
수많은 상처를 이겨내며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의 모습은 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지리산의 돌들은 제법 익숙해진 북한산의 돌들과는 다르다. 같은 화강암 계열일 텐데 색도 좀 더 짙은 회색에 가깝고 조밀함이 좀 더 거칠다. 깊고 풍성한 숲을 헤치며 계속 이어지는 돌계단을 딛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위해 이 길을 만들어온 이름 모를 사람들의 땀방울과 상처로 얼룩져 굵어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느껴진다.
고맙다.
이 친구도 고맙다.
산등선에서 간혹 보여주는 장관은 무거워진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높이 오를수록 구름이 낮아지고 있다.
보통 3-4시간 걸린다는 장터목대피소까지 우리는 꼬박 6시간이 걸렸다. 돌아가는 길은 세석을 거쳐 한신계곡으로 가려했지만 우리 속도로는 무리로 판단되어 새벽이라 보지 못했던 길이었으니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장이 섰다고 장터목이란다. 도대체 어떤 삶이었을까? 잘 상상이 안된다.
Show time!
20kg 짊어지고 온 노고가 한순간 보상받는 순간이다. 제수씨까지 동원해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한상차림이다. 투뿔한우등심에 감자, 양파까지 혹시나 모자랄까 버너가스 두통, 라면 끓일 물까지 따로 준비한 친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살아서 백 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고사목들,
우리 삶은 남겨질까?
아쉽지만 장터목에 친구를 남겨두고 홀로 천왕봉에 다녀오기로 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왕복 3.4km, 1시까지는 돌아와야 돌아가는 막차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살짝 조급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점심도 두둑이 먹었겠다 날아가듯 다녀오련다.
발걸음을 빨리하지만 둘이 함께 가다가 혼자 가려니 왠지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1800m 고지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파도소리도 운무 가삿자락 춤추는 천왕봉 1900m 정상의 자태도 살짝 김 빠진 콜라맛이다.
숙제하듯 천왕봉정상에 올라 인증샷을 찍고 서둘러 내려간다. 정상아래 운무와 뒤섞여 춤추는 단풍의 이어지는 공연도 뒷전이다. 조심조심 발목과 무릎부상을 피하려 스틱을 꺼내 들었다. 바위 바위마다 지나쳐간 스틱의 자취가 눈꽃처럼 피어있다. 미안하다.
2시간 10분 만에 장터목에 도착했다. 친구는 혹시 내가 미안해할까 깨끗이 뒷정리하고 한가롭게 잘 쉬었다고 한다.
이제 백무동까지 5.8km 6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 부지런히 내려갔는데도 표짓말은 1km도 채 안 내려왔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다. 오를 땐 새로운 길에 대한 설레는 맘으로 땀이 범벅되어도 좋았지만 내려갈 땐 다리힘도 풀려있어 자칫하면 발목, 무릎부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또한 시간 맞춰 내려가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감이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를 줄인다. 그래도 친구는 내리막길이라 4시간이면 충분하다며 염려하는 마음을 다독여준다. 빨라지는 발걸음에도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니 5시 백무동이다.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다리와 허기진 배는 마지막 한걸음 한걸음 버스정류소 앞 식당으로 몸을 옮길 때까지 반항하고 있다.
왕복 15km 천왕봉완주 13시간 만에 해냈다!
애쓰고 잘했다. 칭찬한다.
10월의 마지막주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벗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따뜻하게 환영해 준 지리산이 고맙다.
그리고 친구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