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도 꽃이 피는데
올해 8살이 된 아들은 몇 해 전부터 곤충에 심취해 있다. 물론 공룡심취기(!)도 있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은 놀이터, 키즈카페보다 수풀이 무성한 자연환경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경기도 외곽 작은 신도시에 위치한 우리 아파트는 산자락 밑이라 그런지 단지 안에 꽤 많은 생명체들이 산다. 아이는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매일같이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베짱이 등을 채집통에 잡아넣곤 신나 했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 뒷다리 긴 초록 생명체들을 잘도 구분해 가며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그중에도 가장 좋아하는 건 사마귀였다.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앞다리로 순식간에 모든 곤충을 사냥한다. 심지어 암컷 사마귀는 수컷 사마귀도 잡아먹는다. 이 모든 상황을 TV가 아닌 실제로 목격한 아들은 사마귀의 열혈팬이 되었고, 1년에 단 한번 보낼 수 있는 산타 전상서에도 사마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공룡 중에서도 티라노사우르스를 좋아했던 건 아마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왜 아들들은 아니 남자들은 강력한 것에 이토록 끌리는가...
강력하면서도 똑똑한 곤충박사를 꿈꾸는 아들은 가끔 유튜브에서 곤충 영상을 찾아본다. 그러던 어느 날, 콘텐츠의 바다에서 운명처럼 한 생명체를 만나게 된다. 그 이름도 대단한 파리지옥. 이름부터 지옥이 들어가는 데다 식물이 곤충을 먹는다니... 아들에겐 '완전 멋짐' 그 자체였다. 가장자리에 뾰족한 이빨이 나 있는 잎은 살짝이라도 건들면 콱! 하고 닫히는 살벌한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 파리뿐 아니라 여러 곤충을 넣어주는 족족 잘도 먹는 모습에 아이는 열광했다. 물론 씹어먹진 않고 천천히 녹여 먹는다. 결국 이 식물계의 티라노이자 사마귀인 파리지옥을 키우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티라노사우르스를 키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마귀는 며칠 키웠다ㅠ) 식물쯤이야 키워도 되지, 하는 마음에 아이와 함께 근처 화원으로 향했다. 꼭 곤충을 잡아다 주지 않아도 되며 물만으로도 충분히 잘 자란다고 화원 사장님이 설명해주셨지만, 그날부터 아들은 파리지옥에게 바칠 재물을 매일 같이 잡으러 다녔다. 개미, 공벌레, 거미, 모기, 그렇게 사랑한다던 메뚜기도 결국 진상했다.
미래의 파브르, 애그박사 키즈 아들에게도 겨울은 찾아왔다. 빙하기에 공룡이 그랬던것처럼 곤충들은 멸종이라도 한 듯 자취를 싹 감췄고, 채집도 파리지옥을 위한 소소한 사냥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자연스레 파리지옥에 대한 아이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다. 그래도 집안에 들인 생명인데, 행여 죽을까 나는 매일같이 화분받침에 물을 채워주며 파리지옥을 보살폈다. 마치 늪지대처럼 흙을 축축하게 유지시켜주는 게 핵심이다. 날이 더 추워지자 볕이 잘 드는 거실 창가 상석으로 자리도 옮겨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분 중앙에서 길쭉한 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기존에 잎들은 옆으로 축축 늘어져 자라는데 꼿꼿하고 당당하게 일어선 줄기. 궁금하여 검색을 해보았다. 세상에나!
파리지옥에서도 꽃이 핀단다. 식물의 숙명을 거스르고 육식을 하며 자라는 네가, 이름에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네가 꽃을 피운다고? 놀라움도 잠시. 사진으로 만난 파리지옥 꽃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다. 그리고 우리집 피리지옥을 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어서 꽃 피어보거라
지옥에서도 꽃이 피는데... 나라고, 엄마라고 꽃 피우지 못할게 또 뭐란 말인가. 살림을 하느라 아이를 키우느라 그러면서도 소소하게 생업을 이어가느라 피우지 못한 내 꽃. 내 삶이 비록, 어린 시절 상상했던 것보다 척박할지언정 지옥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오늘, 첫 꽃잎을 이렇게 피워본다. 작가로 피워보고 싶은 내 마음속의 꽃. 전파로 전송되면 사라지는 글이 아닌, 아름다운 활자로 남는 글을 쓰는 작가. 나의 브런치 첫 글은 이렇게 생각지 못한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파리지옥아 꽃 피워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