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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일기

새벽의 온도

by 이은

침대에 누워 눈만 겨우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방콕 짜오프라야 강가의 호텔. 강 너머로는 지난밤 눈부신 조명이 불을 밝히던 자리에 어느덧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내려와 앉은 새벽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창을 닫고 있어도 배가 지나간 뒤 물가로 밀려오는 잔물결 소리와 부지런한 새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덮었다. 피부에 닿는 이불의 느낌. 마치, 깨끗하게 마른 면의 밀도 있는 마찰음과 같이 바스락거리며 나를 감싸안는다.


거짓말이다.

새벽 4시쯤 잠에서 깨 뒤척이다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거실을 지나 내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눈앞에는 액자처럼 쓰고 있는 더블 모니터의 오른쪽 화면에 띄워놓은 바탕화면 속 새벽사원이 있을 뿐이다.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니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그려낸 잠깐의 상상이었지만, 어두운 내 방에서 정말 그곳의 온도와 습도와 이불의 감촉을 느낀 것만 같았다.


짧은 상상 속에서 빠져나와 결국은 다시 현실이다. 허무하지 않다. 아쉽지 않다. 오히려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언젠가의 여행을 떠올리며 상상하는 일이 때로는 오늘을 살게 하는 연료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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