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니 생신이 되면, 우리는 어시장에서 제철 해산물을 산다. 마침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라 새우와 꽃게, 그리고 방어와 전어가 주메뉴다.
그렇지 않아도 축축한 어시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물벼락을 맞기 십상이다. 더구나 몸집이 크고 힘이 좋은 대방어가 제철인 요즘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적당히 가격을 흥정하고 손질을 기다리던 찰나, 시선이 앞의 작은 수조에 꽂혔다. 작고 낮은 수조에는 커다란 서랍 안에 최적의 수납을 위해 칸막이를 놓듯이 맞춤형 철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방어가 한 마리씩 들어 있었다. 헤엄을 칠 수 없게. 그 힘을 다 쏟을 수 없게. 마치 관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 같았다. 죽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숨을 쉬고 있지만,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을, 그런 모습.
그저 입만 뻐끔거리며 숨만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알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이 뒤섞이는 기분. 오금에 힘이 빠지고, 차마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다 결국 뒤를 돌았다.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기도, 이러다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러지. 이건 무슨 기분이지.
작년에 처음 생새우의 맛을 알게 된 조카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새우를 보며 두 눈이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아이스박스 안에서 차가운 얼음 때문에 잠시 기절을 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싱싱한 새우이기 때문이다. 조카는 엄마와 삼촌이 머리를 떼고 껍질을 벗겨 손질해 주는 새우를 받아먹는다. 힘이 들어가 있는 도톰한 입술에 새우가 밀착되어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그만, 시선을 피했다. 왜 이러지.
나는 생새우를 정말 좋아했다. 가을이 되면 생새우의 단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순. 그날 방어를 보며 힘들어하던 순간, 그리고 달큼한 생새우를 입에 넣으며 행복해하던 조카에게서 시선을 거두면서도 내 머릿속을 채웠던 단어는 바로 모순이었다. 접시에 가지런히 회 쳐져 있는 방어는 잘 먹으면서, 노릇하게 구워진 새우는 잘 먹으면서 대체 왜.
지금도 수조 안에서 입만 뻐끔거리던 방어가 떠올라 불편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먹겠지. 어쩌면 머지 않아서. 심지어 맛있게. 나의 이런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