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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이 죽어 메뉴판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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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들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첫눈에 반한 사랑>중에서




나도 그녀처럼 영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요즘 나의 원고뭉치들을 매만지면서 궁극의 지점을


그 닿지 못하는 그러나 닿으려고 손을 뻗는 지점을


애써 비켜가는 간극 사이로 스며드는 절망의 빛을


결국 잡고는 한낱 연기로 사라져 애통해하는 꿈을


나의 한계는 더 이상 비겁할 수 없어서 꽃을 집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방법을 모두 잊을래요


내가 가진 매뉴얼은 이미 주문이 끝난 식은 메뉴판


가능성은 늘 서둘러 다음의 가능성으로 몸을 튼다


빽빽하게 박힌 기회들은 오로지 잠시만 유효하다


다시 반복된다면 지금의 선택을 가장 피하고 싶어


그래서 선택이 익숙할수록 망각도 잘 단련해야 해


선택이 자유일 수 없다 부자유스러운 감각의 반복


늘 차선에 웃으며 최선에 불안한 다짐만 익숙하다


내게 견고한 매뉴얼이 있으니까 그모먕 그꼴이다


가격표만 갱신되는 메뉴판에 불과한 줄도 모르고


이야기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철통같이 믿었는데 자물통이 허술한 철밥통이었다


매순간 리뉴얼하지 않으면 매뉴얼은 손밖에 날꺼다


멈춘 것이 추한 것은 무릇 기계의 사정만은 아니다


지닌 것들의 빠진 얼을 단속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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