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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Jun 07. 2021

성서를 읽는 마음

성서는 신화이자 역사다


 “성경엔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도 적혀 있지만 그분의 말씀이라고 전해지는 기록도 있어. 내겐 이게 진리이고 너한텐 저게 진리인데, 무엇을 진리라고 선택할 수 있냐고 말하고 싶겠지? 선택할 필요는 없어. 가슴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성경은 현자들에게 진리를 선택하라고 쓰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가슴으로 읽으라고 쓰인 거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불우하고 비천한 사람은 성경을 가슴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가슴을 울리는 것이야...

그들은 복잡하게 뒤얽힌 마음, 뒤얽히고 상처 받은 마음들로부터 진리를 향한 마음. 그것만을 쓰려고 애썼지. 그들이 옮겨 적은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했어. 하느님이 그렇게 친숙한 일상용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자신의 말을 전할 자로 선택될 만큼 자신과 가까운 인간들도 마음속의 열망과 증오와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자신의 말을 가슴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아셨으니까. 하물며 그런 그들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어야 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극복해야 진리에 다다를 수 있을까?”

                                                                                             윌리엄 포크너 소설  ‘곰’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곰’에 나오는 대사다. 소설의 맥락을 따라가며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소설 속 그들을 그려내고 있는 저자의 가슴과 만나게 된다. 저자는 어떤 삶의 굴곡을 거쳐 왔을까.  어느 시기에 성경의 구절구절들이 빛으로 다가와 그의 가슴을 울렸던 것일까. 그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다가가는 이야기로서 성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읽었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 역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삶의 내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난 ‘무엇’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소명을 실현해 온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성경의 표현 방식을 빌어 표현하자면 ‘하님의 영’이 그의 글에도 숨 쉬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성경을 어떤 특별한 지위에 놓고자 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어떤 특정 종교와 문화를 떠나 이야기 자체로서 인간의 내면에 보편적 울림을 줄 수 있음에 관한 하고 싶다. 문학과 예술 속에도, 정치와 법 속에도, 과학과 다양한 학문이 진화해 온 여정 안에도 살아 움직여 온 성경의 정신을 보게 된다. 특정 집단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빛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다고. 우리 옛이야기 역시 성경 속의 서사와 같은 힘이 숨어 있, 그 속에도 성경 속 그들이 '하나님의 영'이라 불던 것처럼 '하늘의 본성'라 불러온 영이 살아 활동해 온 것이라고.


 살다 보면 왜 그렇게 골짜기를 넘어가는 이야기들이 많은지, 왜 열 두 고개인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시기가 온다.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저승 고개를 넘은 바리공주 이야기는 심층으로 들어가면 서양 신화 오르페우스이야기와도, 바다괴물 리워야단과 싸우는 욥의 이야기와도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양태는 다양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자가 겪는 내면의 심리적 상태는 대개 동일하다. 고통은 우리에게 생의 허무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나를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고.” 그렇게 욥처럼 탄식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겨울 속에서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리의 마음은 다시 봄을 맞는다. 욥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고백했듯이, 그로부터 새롭게 다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듯이, 우리 옛이야기 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팔자를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는 것이.

이는 모두 내가 알 수 없는 보다 큰 우주적 상호 작용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을 의미한다. 모두 크고 작은 삶의 고난 속에서 자아, 즉 에고가 해체되어 죽음을 맞고 다시 새롭게 거듭나 삶을 재창조해가는 상징적 여정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가을 나무가 잎을 떨구고 추운 겨울을 견디며 얼음장 밑에서 다시 새로운 씨앗을 품고 봄을 맞는 이치다. 이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세계 안에서 자기의 소명이라 여기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이러한 원형들은 이야기가 누군가만의 특별한 여정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겪는 보편 여정임을 알려준다.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인간이 지닌 보편적 특질과 삶의 원형적 패턴은 동일해 보인다.


 오래도록 살아남은  신화 속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부르는, 태초의 시간에 관한 나이테가 담겨 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직선의 시간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또 다른 시간은  상대적 속성을 띠고 있다.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부르시간이 거기 있다. 이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경험적 진실과 맞닿아 있는 시간으로 우리의 의식이 근원을 만나 깨어나는 순간이 할 수 있다. 과거의 종말이자 미래의 시작점으로 불리는 이 시간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 느껴 온, 태초의 순간이며, 영원이다.

물리 세계의 상대적 시공간 개념은 내게 신화 속 카이로스 시간의 실재성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의 주관적 체험의 영역만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미시 세계의 물리적 실재와 깊게 관련을 맺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내게 성경은 인류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담은 기록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계시로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인생 여정의 원형 보는 창으로, '하님'은 우리 영혼과 오래도록 관계해 온 그 '무엇'에 대한 상징으로. 나는 우리에게 그런 영혼을 준 그 실재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존재로부터 오는 힘’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라는 말이 수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는 지점 때문에 꺼려진다면 대체 가능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요한도 굳이 "태초에 '말씀'있었다"라고 강조하지 않았을까.

예수의 이야기가 네 복음 저자의 입장에 따라 각각의 공동체에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전해지듯, '하님의 상'도 각각의 인물이 지닌 기질과 환경에 따라 수없이 변화되어 온 과정을 바라보게 되면, 무수히 다양한 얼굴로 자신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하느님을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너무 협소하게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성서라는 신화고난을 극복해 온 개인의 여정기도 하고, 끝없이 변화해  공동체의 여정이기도 하고, 인류 정신의 쉼 없는 재창조 여정이기도 하다. 성경 속에는 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가족, 국가, 그리로 세계, 인간이 하느님을 부르며 다른 타자와 공감의 영역을 넓혀 가는 인류 여정 담겨 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믿다가 타자와 관계하며, 부딪히고 깨지고 갈등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한 차원보다 하느님의 뜻을 발견해 갔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세상 으로 나와 우주적 차원의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간 것이다. 예수는 인류애로 확대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했지 결코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교회라는 특정 공동체 안에 협소하게 갇 하느님만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상대의 겉모습이 아니라  상대의 가슴속에 숨겨진 본성 속에 하느님이 살아음을 드러 분이었다. 주 외친다고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이 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이 죄인이라 여긴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속에하느님의 마음이 살아 숨 쉴 수 있음에 대해 전 분이었다. 그렇게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 깊은 가슴속에 흐른다는 점에서 예수 말씀의  의미가 포크너의 글 속에도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성서라는 신화가 내 마음 치유하 동시에 나와 더불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 영혼의 지도라 여긴다. 나는 이 속에서 히느님’이라 불리는 원형으로부터 ‘존재의 힘’을 얻으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고 싶다.

또한 성서와 신화가 마음을 치유하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신화의 근원으로 돌아가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서로 다르다고 여겼던 것들이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깨닫고, 공감의 차원을 확대하며 상호 보완의 상생 관계로 우리가 함께 걷는 길을 찾고 다. 성경신화 함께 읽는다. 옛 인류가 그 오랜 여정 동안 몇 천 번을 살고 죽어가며 자신들의 의식을 진화시켜 온 생생 거울을 보기 위해서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삶의 문제들을 극복할 힘과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며 공감을 확장하는 법 배울 수 있다고 이제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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