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보크 Jul 01. 2021

한계를 자각하는 시간. 그리고 운명의 변주.

눈먼 자. 오이디푸스 3


  네가 내게 이루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고통인가

   돌고도는 세월 따라 다시 돌아온 고통인가

   말해다오. 불멸의 목소리여. "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취한다는 서사 사실 가이아와 우라노스 시대부터 늘 반복되어 온 신화 주제였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망자신들의 성공 경험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자식을 잡아먹게 되거나 자식으로부터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식을 버린 라이오스가 없었다면 부친을 살해한 오이디푸스도 없으리라. 둘은 대응하는 한쌍 인연 과보요. 이것에서 저것이 생겨난다는 관계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오이디푸스 역시 이전의 신화들과 그리 다를 게 없었으리라.


호메로스의 오이디푸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는 죽었지만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테베를 통치한 것으로 그려진다고 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진실을 알고 난 후 자신의 눈을 찌르고 왕위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는 오이디푸스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부은 발’을 뜻한다. 그는 아버지 라이오스에 의해 발에 못 박혀 버려진 탓에 발에 상처를 지닌 아들이었다. 버려진 상처와 결핍이 무의식에 남아 결국 그의 삶을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부르터져 부은 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를 안고 사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통 속에서도 운명과 맞서며 두 발 인간으로 서 있으려 했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패륜범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의 비극에 함께 울다. 가혹한 운명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스스로를 심판 그는 권좌에서 물러나 방랑의 길을 떠난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았음에도 죄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통탄. 그 비극을 인식하는 인간. 그래서 미워할 수 없게 된다. 


설령 결과가 같다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아들을 유기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 왔다는 점이다. 노력하는 과정이 달랐고, 결과에 책임질 줄 아는 인간의 모습이 달랐다. 그의 과거사 추적 과정은 우리 자신의 기억을 거슬러 가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무의식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여정과도 통한다.  자신의 손에 아버지의  피를 묻히지 않았으므로 죄가 없다고 여기며 타자를 심판하려 했지만 사실 인과의 꼬리를 물고 추적하자 모든 여정의 끝에 자신이 있음을 깨닫게 된 과정이 되었다. 그는 신탁의 예언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고, 운명을 거부했으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자각했다. 그 자각이 핵심이다. 적어도 이 자각은 그가 이성을 통해서 알아낸 진실이었다. 그는  사유를 통해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지를 자각하게 된 인간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진실을 마주 보게 되었고, 자신의 들보를 깨닫고 책임졌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범인임을 깨닫고 난 후, 그의 이성 빛을 발한다. 그는 자신이 답을 맞힌 대로, 테이레시오스의 예언대로, 노년에 눈을 잃고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 피를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찌르고, 떠난 자가 되었다. 내게는 이 모습이 선왕들과 같은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의 비장한 결심으로 여겨진다. 이전 신화의 역사로 볼 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역사를 충분히 쓸 수도 있었나. 자신의 눈을 찌르고 권좌에서 물러남으로써 그가 이성을 사랑했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인물이었음을 증명했다. 나는 그에게서 비로소 '양심'을 지닌, 성찰하는 인간의 한 원형을 본다. 오이디푸스의 아폴론 신탁의 의미가  가리킨 최종적인 방향도 결국 이것 아니었을까.


이는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통한다. 그는 소포클레스와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소크라테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을 통해 '너 자신을 알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무지자각하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당시 소피스트와 다른 지점이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도 진리는 우리가 보는 감각 너머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판단하는 분별력 넘어 현상 너머 인과의 근원을 보게 된 '참된 앎'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우리는 너무 쉽게 운명에 의지네발 달린 동물로 돌아가버리거나, 두 발 인간임을 우기며 여전히 내가 한 지난 일들이 어떤 들보를 낳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존재인지 모른다.  운명과 세계에 기대어 사는 본능적 존재라면,  두발 인간은 운명과 맞서는 독립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세 발은 두 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며 운명의 지팡이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지팡이' 여전히 두발 인간으로 서되, 자연과 . 나를 둘러 관계의 연기에 의해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겸허해질 줄 아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는 우주적 상호작용의 결과로써의 자신을 이제는 수용하는 동시에  끝까지 신과 대화할 줄 아는 자였다. 나는 그이성의 작용을 잃지 않는 직관의 자리라고 여긴다. 설령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영혼. 눈을 찌르고 눈먼 자신을 심판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죄를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영혼을 본다.


오이디푸스의 쓸쓸한 퇴장에 박수를 치고 싶다. 성장을 다한 나무가 사라지지 않으면 후손은 태어날 수도, 온전히 성장할 수 없다. 아버지 세대는 아들의 세대가 자신들의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준다. 운명과 자연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네 발 인간으로 운명을 반복하는 퇴행이 되지 않으려면 그 운명 앞에서 늘 변주할 길을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오이디푸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새롭게 나아가려는 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신 앞에, 세계와 나를 둘러싼 타자 앞에 겸손해진 동시에 그는 주체적 존재로써의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로 보였다. 이후 그의 삶은 신과 대화하는 자였다. 이제야 소포클레스를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부른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나는 여전히 오이디푸스와 같은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것 아닐까. 정당하다고 믿고 행위한 결과들이 사실은 내가 뺏은 타인의 그늘이고, 오늘의 내 행운이 내일의 그늘일 수 있음을 모르는 채로 살아온 시간들임을 나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죄도 모르는 인간과 죄를 인식하는 인간은 다르다. 인식의 차이는 행동의 차이를 가져 올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나아갈 수조차 없으리라.


세계와 운명에 의존하고 기대 온 시간, 더 나은 삶을 꿈꾸 운명과 맞서 온 시간.  한계를 인식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간. 운명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 는 인생의 어느 단계를 지나가고 있을까. 그에게서 변증법적 통합의 여정을 배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이디푸스를 보며 라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떠올린다.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 오멜라스. 정의와 평화와 선의로 가득 찬 곳. 아니, 그렇게 믿는 곳. 그러나  아름다운 오멜라스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 지하의 신음하는 자들 위에 서 있는 것임을 확인한 이들이 하나 둘 오멜라스를 떠나게 된 이야기.


자각하고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 지팡이를 짚고 선 세발 인간. 그에게 그가 감내한 것처럼, 내가 감내해야 할 새로운 고통은 무엇인지, 그 길을 묻게 된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떠날 수 있을까...




참고.

그리스비극 걸작선(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숲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 아폴로도로스,천병희 역, 숲

매거진의 이전글 왜 ‘인간’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