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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Sep 18. 2021

  인간으로서의 자격

 < 인간 실격 > 감상 일지

     


“ 아무것도 못 됐어.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거 같아서, 그래서 너무 외로워. 나 실패한 거 같아.”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길을 잃은 마흔 살의 여자, <인간 실격>의 주인공 이정의 독백이다. 그녀의 독백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독백은 풀어내지 못한, 마흔 살 내 마음의 기록이기도 했으니까. 그녀가 말한 ‘아무것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직장을 잃고 작가로서 이름을 얻지 못한 것, 단지 그것이었을까.


그녀는 묻는다.  

누군가의 가족, 동료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는 존재인가. 세상을 판단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이 자신에게도 주어져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선 '이름'을 가진 자만이 당당하게 그 자격을 부여받은 듯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해고시킨, ‘이름’을 가진 자의 무개념 한 부당 행위에 분노하며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으로, 풀 길 없는 자신의 정당한 분노를 댓글로 솔직히 표현했을 뿐이지만, 결과는 악플러로 고소당하고 경찰서에서 수모를 겪는 일이었다. 카메라는 경찰서를 나오는 그녀의 모습과 그곳에서 악플 금지를 주장하는 윤리적? 다수의 피켓 시위 현장을 동시에 담아낸다. 다수가 인정하는 상식과 보편윤리는 종종 특수한 상황에 놓인, 한 개인이 느끼는 정의와 충돌한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이 쉽지 않다. 대개는 무리 지은 다수의 보편 상식에 묻혀버릴 게 뻔하므로 침묵하게 된다. 목소리를 낸다고 한들, 이름 없는 자의 의견이란 다수가 인정할만한 누군가의 권위를 빌릴 때만 설득력을 지닌다는 현실을 늘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을 가진 자만이 비난할 자격도 있다는 그녀의 절망적 외침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녀의 독백은  나의 독백이기도 했다. 그녀가 관계 속 의무와 역할 너머, 인간, 그 자체로 자기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듯 나에게도 그런 질문이 찾아왔다. 나는 진짜 내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가족이나 동료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격.     


대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역할을 충실히 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자아 정체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사람들과 원만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고 여겼고, 관계 유지를 위해 내 목소리를 내기보다 주어진 대로 수용하며 사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이 사회의 관계 윤리들이 내게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다. 그럼에도 관계 속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당시에는 부모님이 강조해 온 생활양식대로 살아야 인정받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나를 지배했던 모양이다.


비록 소극적이지만, 경조사를 챙기고, 안부를 묻고, 종종 만남을 갖기를 원하는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서 즐거워 보였지만 나는 점점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갖기 어려웠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 여기는 것들에 짓눌려 갈 뿐이었다. 넘치게 주고받는 인사와 예법들. 그것이 누군가에겐 단지  풍요로움함께 나누 선의였을지라도,  누군가에겐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상대적 빈곤감만 잔뜩 얻게 되, 뱁새가 황새 쫒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참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과시의 전장이요. 허영의 시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잣집 흰쌀밥보다 내 집  꽁보리밥이 더 맛있는 이치를,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인 마음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전혀 이해 못 하는 눈치다.)  

내게 세상은 지나치게 번잡스럽고, 과하게 넘치는 풍요의 전장으로 다가왔.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내 주변의 다수가 생각하는 관계 윤리가 점점 내면의 ‘나’의 욕구와 충돌해갔다. 개별자로서의 내가 포기해온 내면의 욕구들이 포기해 온 시간만큼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은 관계 속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자아 정체감을 느끼려고 왔다면 마흔 무렵에는 그동안 묻어온 내면의 ‘나’,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찾아왔다.   


이 부정이 가족과 세상의 인정을 기대하며 노력하고 살았지만, 그런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하며 처음 자기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듯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관계로부터 잠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동안 맺은 관계들을 점검하며 관계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다. 한적해지자 그 시간을 책이 채웠다. 책 속에서 만난 영혼과의 교류가 나를 충만하게 했다.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듯했고, 그 속에서 온몸에 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책을 읽는 동안 비로소 내 기질과 성향대로 살고 있다는, 충만한 감정을 경험했다.  

  


  

 우리는 왜 생을 한적하고 단순한 기쁨 속에 살 수 없는 것일까. 

마음속에선 늘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시절 마음에 둔, 한적하고 고요한 작은 집.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번잡스러운 우리 집과 달리 마을 끝에 조그만 방 하나를 세 들어 산 할머니의 한 칸 방. 그 방엔 낮은 탁자 하나와 성경책 한 권이 전부였다. 무소유의 방이었다. 참 단순한 세간살이였다. 숨바꼭질할 때마다 나는 몰래 그 집 부엌에 숨어들어 비어 있는 그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가 생각하면 이상스럽게도 참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 할머니처럼. 사람들은 그분이 노년에 자식도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산다며 딱하다 여겼지만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미소를 가진 분이었다. 점점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해져 갔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능력(마음)을 갖고 인생의 전반부를 잘 보낸 사람들은 이러한 삶이 그들을 더는 만족시키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때 발달시켜 온 이 사람의 외향적 감정 기능은 영혼에 더는 아무것도 공급하지 못한다. 이제 이 기능과는 다른 잠재적 기능들이 그 능력을 발휘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향성의 직관과 사고 기능의 활동들 (철학이나 신학 연구)이 친구들과 식사를 하거나 휴일에 가족을 만나는 일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삶에는 이렇게 중요한 변화의 시기가 여러 번 찾아온다. ”     

 융의 영혼의 지도(머리 스타인/문예 출판사)     



나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 심리서들을 뒤적거리던 중 융에 관한 책을 읽으며 발견한 구절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또한 책을 읽으며 나의 내향적 특성에 대해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오감에 예민하지 못한 내 열등한 감각기능이 직관을 키우는 데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열등 기능은 우등 기능을 낳고 우등 기능은 열등 기능을 낳기 마련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했고, 나뿐 아니라 타인 또한 제각각의 결핍과 불완전함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기질 따라 배우는 방식은 달라도 인생의 여정에서 결국 모두가 깨닫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진실은 결국 우리 모두가 수평적 존재라는 사실 아닐까. 하늘 아래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 동시에 우리는 제각각의 고유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 들은 풍월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근원을 인식하고, 이것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오래된 진리였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부정. 그녀는 부정과 회의의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녀는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격에 대해, 나는 그녀가 인간 실격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부여하는 여정을 확인하고 싶다. 제 어둠을 양식으로 삼아 빛을 여는 자로 그녀가 세상과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보고 싶다. 설령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시대의 문제이지 그녀의 문제는 아니라고...

그리고 모두에게 무엇이 진짜 해피엔딩인지 이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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