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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Oct 20. 2021

고전(古典)은 고전(苦戰) 읽기다.

길가메시 신화의 함의.

       

전통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폭발력을 갖는 어떤 것이지, 시대와 역사를 막론해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며 영원히 반복되어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현재의 모순을 타파하거나 비판하는 부정적 역할만이 아니라 현대 속에 잠재해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도출해내는 계기 혹은 처방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통을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전통 없이는 결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벤야민이 근본적으로 다루려고 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전승의 문제입니다. 벤야민은 '전통'과 '전승'을 구분하려 합니다. '전통'이 권력 상속 체계에 의해서 고착되어 내려오는 것이라면 '전승'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전통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전통에 소속되어보지 못한, 그 어떠한 것,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엇입니다. ‘전승’은 전통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잘못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권리를 박탈당하고 만 것입니다. (111p)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에서)          



사람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고전(古典) 속에서 고전(苦戰) 해 온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미 고전(苦戰)을 끝낸 그들에게 오늘을 사는 비법을 좀 쉽게 얻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뒤적거려 보지만 결국 쉽게 얻을 수 있는 비법은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된다. 역시 공짜 심보는 문제다. 지름길을 찾으려다 더 먼 길 돌고 있으니 말이다.     


고대 수메르 신화의 주인공 길가메시 왕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한 친구 엔키두도 있었다. 야수 엔키두. 그는 본래 길가메시의 오만을 꺾기 위해 신이 보낸 자였다. 하지만 둘은 막상막하의 결투를 벌이며 오히려 서로에게 반하고 만다. 둘은 합심해서 진한 동성의 우정을 과시한다. ( 둘의 모습은 다분히 자아도취적 사랑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길가메시의 오만을 꺾으려던 신의 계획은 실패한 것일까. 놀랍게도 신의 뜻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엔키두가 전장에 나가 죽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져 결핍이 무엇인지 모르던 길가메시는 엔키두에 대한 사랑으로 더없이 충만한 행복감을 느껴왔으나 그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길가메시에게 상실감과 함께 정복할 수 없는 괴물 '죽음'이 나타난 것이다.(이것이 신의 진짜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슬픔과 허무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을 불행에 빠뜨린 ‘죽음’이라는 괴물을 정복하려고 결심한다.

이후 그는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노인에게 불사(不死)의 약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는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그곳으로 간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영웅답게 그는 불사의 약초를 구해온다. 이 정도면 자타공인 지상 최고의 핵 영웅이다. 진시황도 구하지 못했다는 전설의 약초 아니던가.


그러나 곧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만다. 불멸의 신화가 될 법한 영웅 이야기의 역대급 반전이다. 불사의 약초를 구하느라 고단했던 그가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샘가에서 목욕을 하고 깜박 잠이든 찰나였다. 이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 황홀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시간 그 장소가 곧 에덴동산으로의 회귀요. 무릉도원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훼방꾼이 나타난 것이다. 스르르 다가 온 뱀이 그 약초를 홀라당 먹어 버린다. ( 사실 신의 진정한 계획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을 고비를 넘겨 구해왔다는 영생의 약초는 이렇게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는 결국 영생을 손에 쥐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 그가 전한 불사초 이야기는 ‘카더라 통신’ 일뿐, 증명할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차피 이야기라면 불사를 손에 쥔 것으로 끝내도 되지 않나 싶지만, 오히려 이 점이 길가메시 신화를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남게 한 비결일 수 있다. 이야기 속에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변치 않는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말미에 그는 고백한다. 죽을 고비를 구해 얻어 온 성취도 순간일 뿐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기를...


 그의 교훈은 솔로몬의 전도서 구절들을 함께 떠오르게 한다. (수메르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는 성경의 창세기보다 약 1500년 전의 작품이다. 학자들은 오랜 신화 전승들을 참고하고 개작하여 성경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나니 보라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14)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전도서 3:22)"


 오늘날의 우리에겐 모두 시시한 옛이야기에 불과 보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의 발전이 이미 노화와 죽음의 문턱을 넘어 곧 영생을 획득할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길가메시는 과학문명을 열어 온 이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영웅 인지도. 그런데 어쩐지 자꾸만 불길하다. 이와 같은 패턴으로 진행되어 온, 인류사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다 보면, 신화의 말미처럼 영생의 비밀을 손에 쥔 인류가 목표를 달성했다고 축제를 벌이는 순간, 굳이 신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노아의 홍수를 경험한 신화 속 그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는 건 아닌지. 

    



옛 교훈을 전해 들었다 한들 우리의 운명이 달라질까. 죽을 고비를 넘겨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한들, 뱀이 가져가 버렸기에 누구의 손에도 쉽게 쥐어 줄 수 없었던 것처럼, 깨달음이란 지극히 주관적 체험의 영역일 뿐이므로, 쉽게 타인에게 전해 줄 수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으며, 전해 듣는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길가메시 이야기가 전하는 진짜 교훈 인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었다는 욥. 그도 고난의 여정을 통과한 후에야, “귀로 들은 주를 눈으로 보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또한 예수도 전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제 십자가를 지고 걷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모두 들은풍월로는, 하늘의 뜻도, 영원한 생명의 비밀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음을 일러준다.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적 특성인지도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릿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을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노라 내가 마음속에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하였도다... ”(전도서 1:14-15)     


체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솔로몬이 전하듯 인간은 모두 평등해 보인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배운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체득 전에는 모두 오이디푸스처럼 눈먼 자에 불과할 뿐이므로. 또한 체득을 경험했다고 해도, 체득한 지혜 역시 결코 영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체득으로 깨달은 이치를 누군가에게 쉽게 전할 수도 없다는 측면에서도, 결국 모두에게 공평하니 말이다.

 이것이 발가벗은 채로 하늘 아래 서게 될 때 인간이 깨닫게 되는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길가메시가 죽을고 비를 넘기고 누린 샘가의 짧은 순간의 기쁨처럼 ‘고진’ 뒤에 잠시 오는 ‘감래’의 순간. 그것을 재차 맛보려는 호기심으로 되풀이해 ‘고진’의 모험을 떠나는 본능의 여정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경험을 인간이라는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하는 게 아닐까.  


 “옛사람의 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해되면, 박수를 치게 될 것이요, 가슴에서 발에 이른다면 춤을 추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답을 구하지만 읽어도 모르고, 안다고 여긴 것도 훗날 보면 착각인 듯도 싶은 구절도 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한 구절들이 삶의 단계를 통과한 후 잠깐 이전과 다르게 가슴을 치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공감하게 되면 자연스레 다음 지도를 따라가 보고도 싶어 진다. ‘몸으로 춤을 추게 되는 경지’는 어떤 것일까. 춤을 추는 경지를 느껴보기 위해 사람들은 옛길을 더듬으며 다시 또 새로운 길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결론은 결국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라 여기는, 인생의 무게를 온전히 지고, 자기만의 통과의례를 거쳐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다시 고된 길을 걷는 운명도 고전이  전한 역설 아닐까.




 

벤야민이 제시한 ‘전통’과 ‘전승’의 차이도 내게는 이와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전통과 전승의 차이를 아는 힘도 각자의 체험적 진실에서 비롯된 듯싶기 때문이다. 욥이나 예수도 삶의 체험적 진실을 바탕으로 당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믿고 있던 하나님 상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전통이 아닌, 전승을 발견한 인물이었다.


 전통에 갇힌 구약의 문자적 함의 넘어 신의 정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 신구약 중간기의 욥이라면 예수는 문자적 함의를 넘어 구약의 본질적 차원의 함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변주한 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신약은 구약 전승의 재창조였다. 동양의 공자가 은 주시대의 주역을 가죽끈이 닳도록 읽으며 온고지신을 통해 인과 덕이라는 참 인간상을 제시한 것도 이와 같은 전승의 복원이듯 말이다.


공자와 부처,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들은 모두 문명의 혼란기에 태어나 당대의 인습을 깨고 창조적 인식의 문을 열어 새로운 문명, 즉 정신의 축을 이룬 현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당대를 지배하고 있는 인습 속에서 본질과 멀어져 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악습을 비판했던 그들의 창조적 정신 아닐까. 문자적 의미 너머 그들이 당대에 전하려 했던 '전승'의 심층적 맥락을 말이다.


그들이 일러 준 정신도 세월이 흐르면, 늘 그래 왔듯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복원해야 할 것은 문자적 의미 너머 그들이 당대에 전하려 했던 '전승'의 심층적 맥락이다. 그들로부터 나왔으나, 이미 굳어져버린 전통에 의문을 품고 모순을 발견하며, 그들이 본래 전하고자 한 전승의 내적 함의를 깨닫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고전이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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