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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24. 2024

워킹맘의 이직


한 직장에 오랜 기간 다니다 보면, 아무리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은 매너리즘 기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같은 직장을 다니며 매일 유사한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의 성장이 멈췄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수밖에 없다. 초중고에 이어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늘 끝에는 졸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최소 3년(초등학교의 경우 6년, 대학교의 경우 4년)이 지나면 머물던 둥지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하게 된다. 성장기 학교 시스템에 적응해 있던 탓일까. 한 직장에서 지낸 시간이 3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시시때때로 답답하고, 매너리즘의 기류가 스르륵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6년 동안 매너리즘, 번아웃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엄마’였기 때문이다. 어린 두 아들의 육아를 겸해야 했던 내게 이직이란 꿈꿀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매일 변화무쌍한 육아를 하는 사실만으로도 삶이 벅찼기에 직장까지 변화를 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팬데믹을 기점으로 회사는 재택근무 체제를 도입했고, 재택근무는 워킹맘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복지였다. 팬데믹 이후부터 재택근무를 하며 나는 전업주부와 워킹맘의 사이를 오갈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어린 시기에는 꼭 엄마가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한국 사회에는 만연하게 퍼져있는데, 재택근무 덕분에 나는 그 통념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최근 난 이직을 결심하게 됐다. 채용 공고란을 수시로 확인하며 주체적으로 이직을 선택한 것은 아니고,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약간의 매너리즘은 늘 장착한 채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카웃 제의에 ‘관심이 있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세 차례의 인터뷰 끝에 이직이 최종적으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직을 결정한 후부터였다.


막상 저질러 놓기는 했는데, 아이들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재택근무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여느 전업주부 엄마와 다를 것없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픽업할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린 건 첫째 아이였다.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매일 2시38분(화요일은 1시38분)에 끝난다. 이직을 하면 매일 출퇴근을 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인 즉슨 첫째 아들이 ‘애프터스쿨’을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뜻이다.


첫째 아들은 등교할 때마다 내게 “엄마, 1등으로 데리러 와야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아이. 내가 혹시나 일을 하다 픽업시간에 늦을까봐, 하교 시간에 맞춰 휴대폰 알람을 설정해 놓았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게 우리 집 첫째 아들이다. 내가 학교에 데리러 가면, 함박웃음을 띠고 나에게 달려와 주변 엄마들까지 덩달아 웃음짓게 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넌 이제부터 애프터스쿨을 가야해’라는 말을 해야하다니.


애프터스쿨을 가야한다는 나의 일방적인 통보에 아이는 서글피 울었다. 그치만 내가 지레 겁먹고 예상했듯이 통곡 수준의 울음은 아니었다. 5분 정도 울더니 아이는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왜 자신이 애프터스쿨을 가야하는지, 왜 엄마는 직장을 옮기는지, 왜 더이상 재택근무가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어른과 대화하듯이 아이에게 솔직한 현 상황을 털어놓았고, 엄마도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지만 인생이란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7살 어린 아이는 내 말을 이해했을까? 믿기 어려웠지만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첫째 아들은 애프터스쿨에 가기 몹시 싫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대신 나는 퇴근 후 아들과 20분 동안 '퀄리티타임'(Quality Time)을 보내기로 했다. 아들이 제안하는 어떤 놀이라도 20분 동안 함께 하겠다는 의지였다.


만 4살인 둘째의 반응은 어땠을까? "엄마 난 괜찮아. 유치원 재밌어."


쿨하고 용감한 성격의 소유자인 둘째는 이번에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래 둘째는 첫째와 도서관을 갔다가 업무를 끝내고, 4시30분쯤 픽업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한시간 정도 더  유치원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첫째와 달리 둘째의 쿨한 대답은 내게 큰 용기가 됐다. (언제나 고마운 둘째. 살면서 엄마가 두고두고 잘해줄게.)




아이들에 이어 남편의 의사도 중요했다. 부부는 두 아이를 키우는 한 팀이다. 그동안은 내가 재택근무를 했기 때문에 육아와 가사의 90%를 전담했다면, 이제부터는 최소 5:5 전담이 가능해야했다.


남편의 대답은 쿨했다. 둘째의 성격은 다 남편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좋은 기회인데 당연히 이직해야지. 내가 종종 재택근무를 하며 할 수 있는한 도울게."


이때 난 오랜만에 '나 참 결혼을 잘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 남편은 누구보다 나의 사회적 성장을 응원해주는 사람. 난 그 점이 참 좋다. 가족은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한 팀이다. 각 시기마다 누군가는 더 빨리 성장하고 누군가는 천천히 성장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란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응원해줘야 하는 관계다.


이번에 이직을 하며 워킹맘의 이직은 참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남편, 아이들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이직이 가능했다. 과거에는 그저 나의 상황만 고려하면 됐는데, 역시 결혼과 출산은 인생의 많은 걸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그 모든게 딱 맞아 떨어져 이직이 가능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상황이 계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직 후 힘든 상황이 분명 있을테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응원을 보내준 남편과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투정하지 않고 단단한 마음으로 이겨나가야겠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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