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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Feb 14. 2024

그 어떤 친절함에 대해

이직 후 한달이 넘도록 주말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익히 각오했던 일이다. 미국에서 2024년 예비선거는 3월5일.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현 시점에서 주말이면 시의원 선거 캠페인 사무실 봉사자들은 지역구의 가정집들을 돌며 ‘방문유세’(canvass)를 하고 있다. 한국에선 ‘방문유세’가 금지돼 있지만 미국에서 ‘방문유세’는 대표적인 선거 캠페인 활동 중 하나다. 따라서 난 주말에도 개인 여가를 즐기지 못하고, 캠페인 봉사를 해야만 하는 급박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때가 어느 때인데 방문유세를 하나 싶지만,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실제 투표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평균연령은 꽤 높다. 고로 유권자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는 소셜 미디어에 글과 영상을 올리는 것 보다는 방문유세가 훨씬 효과적이다. 실제로 집집을 방문해 보니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날을 까맣게 잊고 있거나, 우편함에 배송돼 있는 우편 투표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다들 먹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선거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사실 방문유세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여 폭력적인 어떤 유권자에게 폭행이라도 당하는게 아닐까 하는 겁도 났다. 최근까지도 사회부 기자로 일하며 각종 범죄 사건에 관한 기사를 매일같이 작성해 왔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세상은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에서 늘 긴장하고 조심 해야지 만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내면에 깔려 있다. 팬데믹 시기에 아시안 주민들을 향한 증오범죄(hate crime)는 실로 심각했고, 난 LA 한인타운을 걸어 다닐 때면 지금도 조금은 불안하다.



그래도 내가 호별방문을 하고 있는 LA시 12지구는 비교적 깨끗하고 안전한 동네이다. LA시는 이민자가 많은 ‘멜팅팟’의 도시 답게 정치계는 파란 물결이 장악하고 있다. 유권자 대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곳. 하지만 12지구는 역사적으로 LA시에서 유일하게 ‘보수적’인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최근에는 30~40대의 젊은층이 대거 유입돼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이전보다 젊어 졌고, 진보적인 색채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방문유세’는 이렇게 진행된다. PDI라는 앱을 다운받으면, 지역별 유권자들의 집주소, 이름 등의 정보를 부여 받을 수 있고, 그에 기반해 유권자들의 집에 찾아가 벨을 누른다. 기다리다 반응이 없으면 홍보물을 문 틈에 끼워두고 다음집으로 이동한다. 만일 벨을 누른 후 유권자가 문을 열어주면 유세활이 시작된다. 문이 열리면 “저는 누구누구 시의원의 선거 캠페인 봉사자”라고 간략한 자기소개를 한 후 의원에 대한 유권자의 평소 생각 등을 물어본다. 긍정적인 신호가 있다면 투표하는 걸 잊지 말라고 강도한 뒤 홍보물을 주고 떠나면 된다.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면 상황에 따라 설득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자리를 뜨면 된다.



아무리 선거 캠페인의 일환이라지만 주말마다 남의 집을 두드리며 돌아 다닌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나 휴식을 취하고 싶은 시간대에 벨을 누르는 일은 봉사자에게도 고역이다.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어 준 상대방이 표정을 잔뜩 찌푸리면 미안함과 민망함은 배가 된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면 이 좋은 주말에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가 현타가 밀려온다.



그래도 친절한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나 있는 모양이다.



주말에 고생한다며 물 한 잔이라도 드릴까요, 라고 묻는 할머니. 자신은 이 시의원의 열성 지지자라며 홍보 사인까지 집 백야드에 꽂아두겠다는 주민. 집에까지 직접 방문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꼭 투표하겠노라 웃는 누군가의 얼굴은 ‘방문유세’에 지쳐 있던 정신과 몸을 위로해준다.


그럴 때면 다짐하게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누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 우리는 보다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떤 친절함은 타인을 살리기도 한다. 어떤 친절함은 타인을 위로하기도 한다. 친절함을 베푸는 1분이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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