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ris Seok Feb 24. 2024

여행의 기억은 현재를 살게 한다

어릴 적부터 유독 여행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여름휴가로 태국에 갔었다.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난생 처음 경험하는 ‘외국’에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태국의 왕실 관광지를 구경하며,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왕실이라는 게 존재하구나’하고 어리둥절했던 기억. 관광버스를 타고 태국의 골목골목을 돌며, 지금까지 내가 봐 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다. 이후로도 부모님은 매년 여름휴가철이 되면 나와 동생을 데리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을 방문했고, 나는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계절인 여름을 가장 애정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역마살의 근원은. 그렇게나 해외여행 가는 걸 좋아하더니, 결혼해서 미국에 살고 있다. 아무리 해외 여행이 좋다 해도 내 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살고  싶었던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인생이란 참 오묘하다.


미국에 살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덜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한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 솔직히 여행을 하는 순간에는 미국에 살아 다행이다 싶을 때도 더러 있긴 하다. 거리, 비용 등의 문제로 한국에 살면 인생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여행지들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비교적 접근이 용이하니까.


지난 2023년은 30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남편과 나에게 ‘여유’가 깃들었던 해였다. 매일 장거리 출퇴근에 야근까지 해야 했던 남편이 일주일에 최소 1~2번은 재택근무를 하게 됐고, 나 또한 5일 중 4일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여유가 있는 생활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편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여유로운 생활이 언제까지나 보장될 리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고,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일주일, 한달이 멀다 하고 여행을 가는 삶을 살았다.



당일치기 여행, 1박 2일 여행을 포함해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해외여행까지 지난 해 참 많이도 쏘다녔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적금이나 투자없이 버는 족족 여행에 모든 소비를 몰빵해도 되는 걸까 겁이 나기도 했지만, 왠지 우리 부부는 알았던 것 같다. 이 시절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여행에 시간, 돈, 노력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후회는 없다. 남는 건 여행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사진, 영상 뿐이다.


이직 후 1년 동안은 휴가가 없어 여행길이 꽉 막혀버린 오늘의 나는 과거의 여행 사진을 보며 힘을 내고 있다.


이 시절 분주하게 여행다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일상을 버티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에 여한 없이 여행을 다닌 덕에 올해를 버텨낼 힘이 있다. 여행에서의 추억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게 할 보험이었다.


여행을 가지 못하는 대신 내 안에 차곡차곡 다음 여행 계획들을 성처럼 쌓아 올리고 있다. 내년부터는 다시 발에 불이 나도록 다녀야지. 돈과 명예, 권력? 적어도 내게 남는 건 여행밖에 없는 것 같다. 여행을 함께 할 가족과 친구도. 어쩜 난 여행을 하기 위해 지금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작가의 이전글 퇴근 후 집밥이 차려진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