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이 누구예요?
이상형 관련 질문을 받을 때면 어느 순간부터 잠시 멈칫하게 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찰나를 맴돌았다. 이상형이라고 하면 보통 모두가 하는 유명인의 이름으로 대답하는게 인지상정인데,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연예인이라고는 지드래곤 한 명이 전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지드래곤이요!'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이 네? 하고 갸우뚱하는 모습을 봐야만했다. 비슷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상대방의 의아한 표정을 피하기 위해 이상형에 대한 답을 꺼내기 앞서 멈칫하게 됐다.
지난해 지드래곤이 다시 컴백해 활동을 재개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다시 대중 앞에 베일에 싸였던 모습을 드러내자 과거만큼의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악플들은 여전히 사자지지 않았지만, 그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많았다. 다들 말은 안 했어도 누구나 학창시절에 빅뱅 노래 한 곡쯤은 마음에 품고살기 마련일테니까.
지드래곤이 컴백한 이후 단조로웠던 삶에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그와 관련된 예능 영상을 보고, 그의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아직 '그'도 '나'도 그리고 내 또래 모두가 건재하다는 위로를 얻었다. 88년생인 지드래곤과 89년생인 나는 같은 시대를 누렸고, 모든게 젊어진 이 세상에서 88년생의 화려한 컴백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에게 응원처럼 여겨졌다.
그런 지드래곤이 LA에 온다. 것도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이건 뭐, 나를 위해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다고 해야하나. 지드래곤의 공연을 가야만했다. 기필코. 한국에서 지드래곤의 콘서트 티켓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LA의 음악 페스티벌에서 지드래곤 공연을 보는 건 팬으로서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사실 지드래곤이 컴백한 이후 LA에 공연을 하기 위해 올 거라는 건 예측했던 바다. LA에 안 오는 K팝 가수는 없으니까. 지드래곤이 온다면 코첼라, 라스베가스 공연장 등 어디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공연을 한다니, 하하하 너무 좋았다.
남편이 발렌타인 선물로 구해준 VIP 티켓을 들고, 공연을 가는 당일(5/31). 아침부터 분주했다. 일 때문에... 5월 동안 브런치에 거의 글을 쓰지 못했던 건 5월이 1년 중 가장 바쁜 달이라 일에 치여 살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5월은 '아시아 태평양계의 달'(Asian American Pacific Islander Heritage Month)로 곳곳에서 아시아계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사무실 내 유일한 아시안 보좌관이었던 나는 그 행사를 담당해서 준비해야만 했다.
LA 시청, 지역구에서 한 달 동안 4-5건의 아시아계 관련 행사가 열렸고, 3월부터 그 행사들을 준비하며 살았다. 5월31일은 그 행사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청소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었고, 땡볕에서 청소 이벤트를 끝낸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따 지드래곤 공연을 가야하는데...이렇게 힘이 없으면 어쩌나. 푹 쉬고 힘을 내야지.
지드래곤은 그날 맨 마지막 순서인 오후 10시쯤에 등장할 예정이었다. 친구와 나는 더운날 무리하지 말고, 느지막히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오후 7시쯤 집을 나와 친구와 7시40분쯤 만났다. 친구와 나도 늦게까지 공연을 즐기기 위해 낮잠을 푹 자고온 상태라 뽀송뽀송했다. 친구는 6개월차에 접어든 임산부였는데, 지드래곤 팬도 아니면서 날 위해 기꺼이 공연장에 동행을 해줬다. 지드래곤 신곡을 예습해왔다는 친구... 게다가 전세계적으로 품절됐다는 새로 나온 꽃 응원봉까지 야무지게 구해왔다.
응원봉을 들고 셀카를 찍다 말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야, 나 너무나 고등학생 덕후같잖아. 나의 그 덕후스러움에 행복한 웃음이 났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이렇게 깔깔깔 순수하게 웃어보는게 얼마만인지. 이래서 다들 가수 덕질을 하는 걸까?
오후 10시 10분. 모두가 숨죽여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
Power 노래를 부르며, 전설의 지드래곤이 등장했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여겨지는 지드래곤이 이곳 파사데나 로즈볼 스태디엄에 등장하고야만 것이다. 꺄아- 함성이 절로 나왔다. 휴대폰 줌인을 해서 무대 위의 그를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휴대폰 안의 그를 보는건 마치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 같아서, 이게 현실이 맞나 싶긴 했지만 나와 함께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드는 주변 관객들 덕에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몇 곡 노래가 끝나고, Hello LA, 라고 운을 뗀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뭐 무대 위 그의 존재만으로도 좋았다. 지드래곤은 신곡들 위주로 선곡을 했는데, 이미 수없이 신곡을 재생해온터라 모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공연 당일부터 지드래곤 팬이 된 친구도 예습을 철저히 해온 터라 한 두곡을 제외하고선 거의 다 "나도 이 노래 알아!"라며 소리쳤다.
공연 중간에는 CL이 서프라이즈로 등장해 지드래곤과 함께 Leaders라는 추억의 랩을 한 곡 뽑아냈다. 2ne1은 빅뱅만큼이나 내 젊은 날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가수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시애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러 난 애 둘을 낳은 엄마가 되어 LA에서 그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구나 싶었던 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험난했다. 빽빽했던 주차장을 겨우겨우 빠져나와야 했으니... 그래도 내 인생이 이만하면 살만한게 아닌가 싶어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 찍은 공연들을 되돌아보니, 기분이 더욱 더 좋아졌다. 역시 어깨에 담이 결릴 정도로 고생해서 모든 순간을 담아두길 잘했다.
다음번 지드래곤 LA 공연도 이 응원봉을 들고 또 오기로 친구와 약속했다. 그때쯤엔 친구도 애를 출산해 어느덕 애를 둘이나 낳은 엄마가 되어 있겠지. 지드래곤이여 부디 몸도 마음도 건강히 영원히 우리 곁에 있어주길. 할머니 될 때까지 공연장에 가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