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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런던 여행

by Iris Seok


런던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밤에 도착한 후 맥주 마신게 전부인데 벌써 여행 둘째날이라니 뭔가 마음이 분주해졌다. 여행에서의 시간은 평소보다 매섭도록 빨리 가기 때문에 한시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시차적응 문제로 새벽 4시부터 눈이 떠졌던 부모님과 새벽 산책을 나섰다. 새벽 4시에 나가기에는 안전상 불안할 것 같아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때우다 오전 5시10분쯤 나왔는데, 꽤나 밝아서 안심이 됐다.

새벽의 템스강변은 전날의 축제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고요했다. 웨스트민스터브릿지를 건너며 강을 가운데로 둔 채 오른쪽의 빅벤과 왼쪽의 런던아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런던'하면 떠오르는 명소 두 곳이 한 눈에 담기니, 내가 진짜 런던에 오긴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아빠는 한국은 한강을 바라보는 곳은 죄다 아파트인데, 영국은 강 주변에 정부 건물들이 많다고 설명해줬다. 실로 템스강 주변에는 근사한 건물들이 많았고, 주거 지역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글을 쓰며 정보를 찾아보니, 역사적으로 런던은 강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템스강은 수백 년간 교통과 무역의 핵심이었다. 따라 의사당, 궁전, 법원 등 주요 국가 기관은 강변 주변에 지어졌다. 지금까지도 영국은 강변 조망권과 역사 경관 보존 규제가 엄격해서 고층 주거단지가 강가에 들어서기는 어렵다고 한다. 유럽 대부분 대도시도 오래된 행정 중심지가 강 주변에 있어 한국보다 강변에 공공건물이 많다. (그에 반해 한국은 1970년대 이후 한강 종합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이에 따라 한강을 주거지로 한 대규모 분양과 개발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강변을 따라 주거용 고층 아파트가 빼곡하게 채워져있게 됐다.)



산책 후 집으로 돌아와 여지껏 자고있던 남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런던에서의 첫 아침을 먹을 곳은 소호에 위치한 ‘The Breakfast Club.’ 보통 여행지에 가면 Yelp나 구글 평점을 요긴하게 이용하곤 한다. 이곳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의 리뷰는 대개 믿을만하다. 5점 만점에 최소 4.5 이상의 식당을 선호한다. 5점에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실제로 맛도 분위기도 좋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 아침을 먹으러 간 ‘더 브렉퍼스트 클럽’은 귀여운 오렌지색 외관으로 기분을 들뜨게했다. 우린 들어가기도 전부터 사진을 몇 장씩 찍어대며 설레던 첫 식사 장소를 기록했다.


식당은 좁고 길었다. 런던 사람들은 까칠할 거라는 편견을 깨고 종업원은 친절하게 주문을 받았다. 음식 맛은 기대 이상. 계란, 소세지, 감자, 베이컨, 핫케이크로 이뤄진 딱 영국식 식사('잉글리시 브렉퍼스트')였다. 미국에서도 이런 아침은 많이 사먹어봤지만 유독 이곳에서의 아침이 맛있게 여겨졌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에서의 첫번째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코벤트가든의 '닐스야드'부터 향했다. 닐스야드는 인스타그램 감성의 명소로 알록달록한 건물 외관이 특징이다. 이곳은 독립카페, 와인바 등이 즐비하게 모여있고,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코벤트가든과 소호는 도보로 10분 거리라 걸어서 구경하기 좋았다.

피카델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는 화려한 전광판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뉴욕의 타임스퀘어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뒤이어 웨스트엔드 중심부에 위치한 리젠트 스트릿을 걸었다. Piccadilly Circus를 지나면 직선 길이 아닌 아름다운 곡선 길이 쫙 펼쳐진다. 사진을 찍어야 할 구간임에 틀림없다.


런던 여행을 하며 느낀거지만 런던이 크면서도 매우 작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요 명소들이 밀집해 있어서 걸어서 여행하기 좋은 곳이었다. 코벤트가든, 소호, 트라팔가 광장, 피카딜리 서커스, 차이나타운 등 전부 걸어서 10~15분 거리였다. 런던은 뉴욕보다 면적이 넓고 교외까지 포함하면 엄청 큰 도시지만, 중심부는 서로 붙어 있어서 오히려 뉴욕보다 작게 여겨졌다.


게다가 런던은 미국 어느 도시보다도 깨끗하고 쾌적해서 걸어다니는데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걷는 여행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여러모로 최적화된 도시였다. LA에서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LA가 걸어다닐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LA에는 노숙자도 길거리에 많아서, 솔직히 걸어다니면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2028년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LA시가 노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LA 주민들이 그 누구보다도 궁금해한다.



하루 종일 걸어다녔더니 스마트 워치에 찍힌 걸음 수가 2만보가 훌쩍 넘었다. 고작 여행 첫날인데 몸이 파김치처럼 절여진 기분이다. 부모님은 여행 중 잠시 호텔에 가서 낮잠을 주무셔야겠다고 했다. 트라팔가 광장에 호텔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몸이 피곤하면 호텔에 얼마든지 들려 쉴 수 있었고, 이건 여행 내내 큰 이점이었다.




잠시 호텔에서 쉬었다가 엄마와 나는 옷을 갈아입고 뮤지컬을 보기 위해 나섰다. 런던까지 왔는데 뮤지컬을 보지 않고 가면 섭섭하니까 짧은 일정 속에 겨우 끼워넣었다. 다만 뮤지컬에 큰 감흥이 없는 아빠와 남동생의 표는 끊지 않았다. (매우 잘한 결정 ㅎㅎ) 한국에서도 엄마와 나는 주기적으로 뮤지컬을 보러가곤 했다. 뮤지컬을 볼 때면 무대 위 배우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달돼 관객인 나까지 전율이 돌았다. 누군가 온 힘을 다해 몰입하는 순간을 지켜보는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뮤지컬을 보는 곳까지는 도보로 15분 안팎. 아픈 발을 이끌고 엄마와 밤길을 걸었다. 그래도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가로등, 반짝이는 간판, 차량 불빛 등으로 거리는 생각보다 밝았다. 엄마와 내가 보러 간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실패할 수 없는 명작 뮤지컬이다. 주인공 크리스틴의 Think of Me를 들으면 입이 저절로 떡 벌어진다. 게다가 이날 기억에 남는게 우리 앞에 앉았던 아시안 여성(한국인으로 강력하게 추정)이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남자친구와 함께 왔는데, 공연 내내 남자친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지…뒤에 앉은 우리까지 자연스럽게 그 커플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유명한 넘버 곡과 우리 바로 앞에 앉은 커플의 애정행각이 그날 밤 기억의 전부다. 시차와 피곤함으로 인해 엄마와 나는 아쉽게도 계속 졸았고, 공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른 호텔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 아무리 좋은 공연이 있어도 3박4일 일정에는 무리였던 것 같다.


그래도 뉴욕, 라스베가스, 엘에이에 이어 런던에서까지 엄마와 함께 뮤지컬을 봤다는게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 뮤지컬을 봐도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로 느끼는 뮤지컬이 가장 좋은 건 어쩔 수 없는걸까?



런던에서의 둘째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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