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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팅힐 서점 방문기

by Iris Seok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나는 영화 메이트였다. 매주 주말이면 TV에서 명화극장이 방영했고, 엄마와 난 나란히 쇼파에 앉아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할머니, 아빠, 남동생이 잠든 조용하고 어두운 거실에서 TV 불빛만 새어 나왔고 엄마와 난 숨 죽이고 영화를 보곤했다. 그때 그 시절에 봤던 영화들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영화 '노팅힐'도 엄마와 집에서 함께 봤던 영화였다. 1999년 개봉한 이 영화는 2000년대에 들어서기 딱 직전 무렵의 아날로그 감성이 잘 담겨있다. 탑스타와 서점 주인이 사랑에 빠지는 서사가 현대판 ‘로마의 휴일’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특히 주인공인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는 그 시절 로맨스 영화의 장인이었다. 이들이 나오는 영화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봤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가 기대만큼이나 재밌었다.

‘노팅힐’은 26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때때로 꺼내 보는 영화다. 올해 초 넷플릭스에 노팅힐이 올라와서 오랜만에 영화를 감상했는데, 샌디에고에서 LA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 노팅힐을 보고 있자니 세상 낭만적이었다. 어느새 20년이 흘러 소녀이던 내가 아줌마가 됐건만, 로맨스 영화르 보고 설레는 맘이 드는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래서 영국 여행을 앞두고 노팅힐에는 꼭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런던과 노팅힐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서 런던 여행객이 노팅힐을 방문하는건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와 난 영화에서 휴 그랜트가 운영했던 서점에 갈 생각에 아침부터 설렜다. 남동생과 아빠는 "노팅힐, 그게 뭔데!" 모드였지만서도.




AI 세상에서 자유여행은 너무나 편해졌다. 챗지피티를 켜서 나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노팅힐까지 어떻게 가면 좋을지 물어봤다. 버스+도보 노선을 추천해줘서, 런더의 2층 버스도 타볼 겸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약 40-50분.


2층 버스 맨 앞자리가 마침 비어 있어서 냉큼 앉았다. 창이 크고, 앞이 훤하게 뚫려 있어서 창밖 구경을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과 달리 건물이 낮고, 고풍스러운 런던의 풍경을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엄마와 난 드디어 꿈에 그리던 노팅힐 서점에 왔다. 내부 인테리어가 아예 바뀌어서 영화에서 나왔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념으로 엄마와 책 한 권씩을 사서 나왔다. 노팅힐 지역은 건물 색상이 알록달록해서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재미가 있다. 런던과는 사뭇 다른 느낌. 스트릿에 마켓이 열려서 길을 걸으며, 물건들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흘렀다.


노팅힐에서만 살 수 있는 에코백에 순간 지갑이 열릴뻔했지만, 돈낭비 같아서 꾹 참았다. 예쁘다는 이유로 충동적으로 구매한 뒤 집에 쌓아둔 에코백이 한가득이기에...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노팅힐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야외 테라스 좌석이 가장 예쁜 곳에 길가다 들렸다.


이날 대낮에 마신 화이트 와인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물론 맛도 좋았지만, 이때의 분위기, 날씨, 기분, 여유로움 등이 다 합쳐져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여행을 할 때 명소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정작 여행이 끝난 후 기억에 남는 시간들은 대개 여유롭게 카페에서 노닥노닥 하던 시간들이다. 그러니 여행지에서는 하나라도 더 구경하려고 애쓰지 말고, 시간 낭비를 하는 사치를 부려봐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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