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 않고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원하는 물건을 가져본 기억이 없었다. 새 옷을 선물받은 기억도 없다. 언니 옷이나 엄마 옷만 물려받던 패션잡지 덕후는 늘 돈을 많이 벌어 멋쟁이가 되는 꿈을 꾸었다(이 얼마나 큰 현실과 로망의 괴리인가.....) 열아홉 수능시험을 막 끝내고 부모님 강요로 착수한 나의 첫 알바는, 시간당 1500원씩 적립한 한 달치 급여를 봉투째 나이스클랍 투버튼 코트로 바꿔버렸다. 딱히 노동시장에 내몰릴 생각은 없었지만 국내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 매장에서 삶의 힘겨움을 몽땅 겪고는, 애늙은이가 되어버렸는지 생애 첫 지름신이 강림한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이야 나도 알았지만, 힘들게 일해 번 돈을 당연히 부모에게 내놓으라는 압박에 반항심이 발동한 것이다. 내 노동은 나의 것이고, 대학에 가려면 교복 말고 사복도 필요한데 내 취향의 소유물이 없어서 서글펐다. 그런데 2년 후 남동생이 나를 따라 같은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알바 주선 대신 당시 적잖은 돈이었던 운전면허 학원 등록비가 쾌척되는 것을 보고 망치로 내려치는 만치 충격 받았다. “남자는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해”란 이유였고, 사회에 나와 ‘2등 시민’이라는 자각이 들기도 전에 단지 성별을 이유로 내가 경험한 차별이었다. 이것은 성장과정에서의 여러 일들과 더불어 나의 억울함을 배가시켰고 이후 ‘착한 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짐을 사서 부쳐야 했던 기숙사 생활에 종말을 고한 후, 서울에서의 힘든 정착기를 거쳐 (임대한) 내 방이 생기고 나자 소유욕이라는 것이 폭발해버렸다. 일생을 참고 절제할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가 아니면 누구도 대접해주지 않던 사람의 결핍이 과한 보상심리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나를 소중히 다루는 일로서의 쇼핑
대접받는 기분 때문에 쇼핑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분신처럼 물건을 아끼는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내 경우엔 스스로에게 보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옷을 살 때가 제일 좋았다. 근근이 알바 하는 대학생의 빈곤한 주머니 덕에 고객님 대우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내 취향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이 재미있었고, 저렴한 옷을 센스 있게 매치해서 다닐 때 사람들의 칭찬이 좋았다.
어릴 때도 바비인형 놀이를 즐기지 않았지만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려면 옷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지나치게 페미닌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힘준 프로페셔널 복장이 곧 기자-작가의 전투복쯤 되신다), 여러 공연이나 영화작업에 참여하면서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일에 익숙해져갔다. 춤출 때 입는 옷, 운동복, 잠옷이나 실내복, 포멀한 옷, 평소 즐겨 입는 빈티지한 레이어드용 옷 이런 식의 카테고리가 점점 다양해지고 수량이 많아지자 옷장도 늘어나서 이제는 이불장 하나, 옷장 두 개로도 수용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이 정도로 많은 물건들을 샀으면 자존감이 지붕을 뚫고 하늘로 승천해야 마땅하건만.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 하아)
어쨌든 물건 간수의 가장 으뜸가는 법칙은, 자신이 면면을 파악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관리가 가능한 수량의 물건만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놓고 방치하는 옷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지 가물가물하고, 원하는 옷을 찾아서 입으려면 무더기를 발굴해야 하는 처참한 지경이다. 게다가 가장 취향을 타는 물건이고, 또 사이즈가 천차만별이어서 옷을 적당한 주인에게 찾아주는 일이 정말 어렵다. 그래서 되살림가게와 기증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멀리해야 하는 녀석이 바로 ‘본전 생각’ 되시겠다.
본전 생각은 이제 그만!
아무리 좋은 옷이거나 애정하는 아이템이라고 해도 지금 현재에 자주 이용하지 않고, 향후로도 빈도가 낮다면 그 물건은 소유의 범주에서 제하는 것이 옳다. 팔 때 손해를 보거나 공짜로 양도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물건에게는 그 존재를 알아보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을 덜어내는 일이 내게 보상의 일부를 취소하거나 ‘실패의 일부’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내 보상시스템이나 자아존중감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귀가 얇고, 그것을 소유한 내가 멋져 보인다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큰 일이고 몇 번의 고민이 필요함에도 덜컥 사게 된다면, 그건 나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칭찬이나 타인을 위한 과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게 있어 ‘절제’란 시스템이 발동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를 어제 상담선생님과 얘기했는데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마음의 기저에 발동하는 심리를 알아냈으니 이제는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만 자명하다.
그래서 글을 맺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찰나, 더는 고민하거나 분석해볼 만한 여지가 없을 때는 일단 행동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제 실행편을 작성할 때가 되었나보다.
미니멀리즘 책을 썼고 새 삶을 살고 있는 지인은, 아예 트렁크 하나 분량을 정한 후에 나머지 물건을 몽땅 덜어내는 방법을 썼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니, (트렁크보다는 많은) 적정 수준의 물건의 양을 설정한 후, 매 카테고리마다 아이템 수를 줄여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써볼 작정이다. 정장 10벌, 계절마다 10벌, 그리고 춤추는 옷과 운동복은 일단 유지하고 나머지 분야는 추후 경과를 지켜보며 실행하는 것으로. 그리고 2주 정도 후가 될 다음 글에서는 이 결과를 갖고 돌아오겠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