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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y 02. 2019

비욘세의 '홈커밍', 레전드를 보다

춤추는 여자는 섹시하지만 역시나 명불허전

넷플릭스 폐인이 된 지 어언 4개월, 나는 주로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주름잡는 시리즈물들을 봐왔다. 최초의 여성 레슬러들이 등장하는 '글로우', 간지 나타샤 리온님의 얼굴만 봐도 영감이 팍팍 솟는 '러시안 인형처럼', 그리고 시즌 6까지 주파하느라 퀭한 눈에 다크서클을 선사한 '오렌지 이즈 더 뉴블랙', 그리고 기행을 일삼는 팝스타에서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레이디가가 155cm의 도발'까지. 참 일관된 취향이다. 



사실 비욘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3인조 걸그룹 '데스티니 차일드'로 혜성같이 등장해 팝계를 주름잡던 시기 나는 대중음악, 특히 팝뮤직엔 관심이 없는 교회언니였기 때문이다. 이후 솔로로 전향, 시대를 풍미한 명곡들을 노래할 때도 그저 귀에 익숙한 음악이었을 따름이고 수많은 매체를 장식한 그녀의 숨막히는 몸매는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에 존재했다. 내 몸은 섹시함, 그리고 보기만 해도 주눅드는 압도적인 피지컬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사실 작년에 휘트니 휴스턴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휘트니>를 보지 못했다면, 나는 흑인 디바로서 비욘세가 지녀야만 했던 무게감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하는 수많은 이들을 '임파워링'해야 하는 위치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휘트니는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문화를 탈색한 채 백인스러운 '팝뮤직'을 부름으로써 대중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비욘세가 당당하게 '블랙 파워'를 외치게 된 건 그간 미국 사회가 표면적으로나마 다양성을 포용하게 된 것을 반영한다(정치적으로는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과 같은맥락이다). 그리고 대중음악의 장에서 흑인들이 지닌 지분과 이들 특유의 '스웨그'가 이제 하위 문화가 아니라 메인 스트림의 반열에 올랐음을 뜻한다. 


이런 비욘세에게 '2018 코첼라 뮤직 페스티벌'이 특별히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최초로 흑인 여성 헤드라아라이너로 무대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둥이 임신으로 인해 계획한 2017년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고 (레이디가가가 비욘세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 출산 직후 99kg까지 나갔던 몸을 추슬러 바로 연습실로 복귀한 비욘세가 예전같지 않은 몸을 이끌고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욘세는 '홈커밍'을 공연의 테마로 삼고 무대를 빛내줄 댄서와 밴드 한명 한명과 교감하는 것은 물론, 의상 하나까지 완벽히 준비될 때까지 체크하며 준비해갔던 무대감독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했으며, 무대에서는 완벽한 디바의 모습으로 관객과 눈을 맞추며 여유롭게 무대를 호령했다. 


(흑인 아티스트로 이뤄진) 200명이 피라미드형으로 꾸며진 무대에 올라가 완벽한 라이브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누구 하나도 밑그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이 무대가 각자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고도 남았다. 너무 작아서, 혹은 뚱뚱해서 다른 공연에 서지 못했던 댄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비욘세가 홀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완벽히 어우러지는 점이 그간의 호흡을 짐작하게 했다. 2시간 동안 계속된 공연은 그저 축제의 일부가 아니라 단독 공연으로서 손색이 없는 빼어난 구성과 연출이 돋보였다. 그리고 대부분 유색인종인 관객들은 단지 무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이 모든 것을 선사한 비욘세에게 '리스펙트'의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2시간 2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다양한 흑인의 몸을 생동하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보통의 흑인보다는 마른 몸이 대부분이었지만(댄서들의 경우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그 안에도 아주 다양한 체형이 공존했으며 폭발적인 에너지와 음악을 완벽히 이해하고 표현하는 각자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칼 같은 군무는 기본, 댄서들 각자의 표현과 역량을 다채롭게 담아낸 안무가 너무 역동적이었다. 베이스 기타와 드럼을 연주하는 뮤지션에서부터 여성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게 아티스트이자 연출가, 퍼포먼서 비욘세는 '흑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아주 훌륭하게 무대에 녹여내고 있었다. 



비욘세 하면 굴곡진 그녀의 몸선, 특히 터질듯한 허벅지와 엉덩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몸은 인종마다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무기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편견 때문에 나도 비욘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양인 여성인 내가 나의 아담한 체구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몸을 있는 (물론 어렵지만)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듯, 육덕진 곡선 때문에 의도치 않게(의도한 것보다 더) 성애화된 이미지에 갇힌 비욘세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며 "뭐 어때서? 이것도 내 모습의 하나일 뿐이야!!"를 허리와 엉덩이의 움직임으로 표현할 때, 그건 외설도 유혹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힘과 강인한 자아로 보일 따름이었다. 또 비욘세는 아이를 낳은 몸의 회복성, 그 놀라움을 초반부에 꽤 공들여 강조하고 있다. 



결국 왜 '그런 춤'을 춰서 나를 흥분시키냐는 어떤 남성들의 일갈은, 자신의 약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태세가 아닌가. 다양한 체형의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성이 그것을 이용해 춤추는 것은 누군가를 타락시키려 함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즐겁고, 빛나는 순간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나는 비욘세를 보면서 특정한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갖고 잇는 아우라와 자신감,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좋은 무대를 꾸리고자 노력하는 것에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됐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평을 '몸과 태도'에 집중해서 쓰는 이유다. 그녀만큼 훌륭한 태도로 일하는 프로페셔널로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춤추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춤을 추고 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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