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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Mar 10. 2024

소모임 - 김소연 시

촉진하는 밤,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2023.


촉진하는 밤, 김소연 시집 - 소모임


소모임 


촉진하는 밤,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119p.



술은 정종이 좋을까요


와인을 가져왔으니 맥주만 살까요


현관문을 여니


푸른 벽이 있고 푸른 벽을 여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타자기 옆에는 피아노가


피아노 옆에는 텅 빈 새장이 있습니다



육수가 만들어지는 동안


배추 위에 느타리를 얹고 느타리 위에 숙주를 얹습니다


잘생긴 표고버섯에 십자 칼집을 넣습니다


개인 접시를 앞에 두고


둘러앉아 건배를 하고 식사를 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 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예의입니다



상담사에게서든


부모에게서든


친구에게서든


거래처에서든


들어온 말들이


우리의 숟가락에 밥알 대신 


얹혀 있을 때에



저도 그래요


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모임



(이하 중략)

※ 굵고 색깔있는 글씨는 제가 수정했고, 원문 시에는 다르게 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상담사에게서든


(중략)


들어온 말들이

우리의 숟가락에 밥알 대신 

얹혀 있을 때에


소모임, 김소연, 촉진하는 밤, p.119




위의 구절을 읽고 제가 얼마나 찔리던지요.


그동안 제가 했던 어떤 말이 내담자의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면 어쩌나, 쿵 내려앉았답니다.


상담 회기는 50분에서 1시간이면 끝나죠.


내담자 분들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눈물을 흘리기도, 일주일 동안 다음 상담에서는 선생님한테 이렇게 말해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 얹힌 말 한 마디, 질문 하나가 마음 속 우물에 파문을 일으켜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나 어떻게 살아야하지? 혼란을 더 하기도 하거든요.


그 표현이, 질문이 꼭 필요했더라도 어떻게 해야 부작용이나 상처를 최소화해서 잘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에 충동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기가 참 어려워요.


자녀 상담을 신청했던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선생님이 처음에 어머니도 상담받아 보시면 어때요?라고 하셨잖아요. 

그때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럴까 싶어 기분 안좋았어요."


"어머니께서 뭐 때문에 아이 대신 나서서 해주느냐고 물었을 때도 

아차! 하고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했어요."


자녀상담을 종결하자, 마지막에야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상담 권유와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한 상담자의 질문이 민망하고 서운하셨겠지요?


시 구절에 나온 대로 '상담사에게서 들어온 말들이 우리의 숟가락에 밥알 대신 얹혀 있을 때'가 그 어머니에게도 있었고요.


그런 순간에 대해, 제가 직면시켰던 말씀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말이라는 건 신중하게 내뱉지 않으면 본전 찾기도 어렵잖아요?


안그래도 밖에서 말에 대한 상처를 받고 상담에 오는 내담자들에게, 


오늘도 조심조심 입을 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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