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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Dec 11. 2023

동네에서 썰매 타기

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3년 12월 9일 연재

원래 베를린은 겨울에 눈이 제법 많이 오는 도시였다. 하얀 눈과 함께 도시 곳곳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들, 사람들의 두툼한 옷차림과 잔인하리만큼 짧은 햇볕은 베를린의 한 겨울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이 두툼하게 내리기 시작하면 도시 곳곳에 각기 썰매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역시 한 겨울 하얀 눈으로 뒤덮인 베를린의 대표적인 한겨울 풍경이다.


동네 곳곳에 있는 넉넉한 공원들의 역할은 사계절 내내 부지런히 바뀐다. 맑은 공기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람들이 햇빛과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간을 내어준다. 그리고 공원마다 빠지지 않고 빼곡히 들어서 있는 놀이터는 아이를 키우는 가족들에게는 필수와도 같은 존재다. 사계절 내내 시민들의 삶에 다양한 배경이 되어 주는 도심 속 공원은 이곳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낙엽이 지고 날씨가 추워지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공원들은 한 번 더 변신을 한다. 녹지가 뒤덮인 비탈면은 눈썰매장이 되고, 비탈면 끝에 위치한 연못은 아이들의 스케이트장이 된다. 오직 자연 요소로만 이루어진, 실외공간으로만 이루어진 겨울철 아이들 놀이터는 이만한 곳이 없다. 이쯤 되면 '공원 속 놀이터'가 아니라, 공원 자체가 놀이터가 된다.


동네에서 썰매를 탄다고 비료포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썰매부터, 브레이크까지 달린 플라스틱 재질의 스키장썰매, 비행기와 같은 손잡이가 달린 1인용 썰매, 자동차 모양의 썰매까지, 다양한 아이들만큼이나 썰매의 종류와 재질, 타는 방식도 재각각이다. 청소년 무리부터, 젊은 연인들, 심지어 아기띠를 한채 썰매를 타는 아빠의 모습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자연 속 눈썰매장의 모습이다. 넓게 트인 공원에 모여 까르르 웃으며 썰매를 타는 모두에게 두툼한 장갑, 모자와 썰매는 겨울 내내 언제든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조금 갸우뚱하곤 했다. 눈이 펑펑 내려 하얀 겨울이 된 것은 이해하지만 스키장에서나 봄직한 모습으로 썰매를 가지고 동네 길거리를 바쁘게 지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가 보다, 여기 아이들은 원래 그런가 보다 넘어가던 풍경의 당사자가 되어보니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실 한겨울 눈 덮인 동네 공원들은 추운 겨울날 산책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아니기에 분명한 목적이 없으면 가지 않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에 휩쓸려 가보기 전에는 경험하기 힘든 풍경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널찍한 공원들은 한 겨울, 아이들이 썰매를 타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이다. 녹지, 길, 비탈길 가릴 것 없이 모든 곳에 골고루, 그리고 푹신하게 뒤덮인 하얀 눈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자극한다. 맨날 다니던 산책로 상관없이 썰매가 잘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그저 썰매를 즐길 뿐이다. 보통 녹지 공간이 넓어지면 비가 오는 경우를 대비해 비탈길 끝에 호수가 있기 마련인데, 아마도 아이들은 호수가 더 꽝꽝 얼어 스케이트를 탈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여느 조경 건축가는 겨울의 이런 풍경까지 고려했던 것일까.


금년처럼 눈이 제법 온다고 예보가 된 겨울엔 저마다 썰매를 구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갑자기 수요가 급등하는 탓에 썰매를 구입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중고 썰매는 금세 동이 나곤 한다. 중고거래에 웃돈까지 제안하는 기이한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중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어떻게 봐도 족히 십수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중고 썰매들이었다. 과연 저 썰매들이 제 기능을 할까 의문을 품었지만 가격은 신제품 못지않았다.


여하튼 코로나가 정점에 치닫던 2020년 겨울, 우리 아이는 2살이 되기 전이었다. 걷기는 하지만 썰매를 탈 정도 성장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마침, 코로나로 인해 인간의 활동이 주춤해지자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랜만에 '겨울 다운 겨울'을 본 우리는 주변 지인들과  공원으로 향했고 그때 처음 '동네 눈썰매장'을 경험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리 일행은 여름에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플라스틱 욕조를 썰매 삼아 놀았다. 놀기에 바빠서 부끄러운 줄은 전혀 몰랐으나, 동행했던 모든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미끄러져 가는 썰매를 한참이나 부러워했다. 그때 함께 있었던 모든 어른들은 동시에 투철한 부모정신을 느꼈다. '어떻게든 제대로 된 썰매를 구하리라'


그때부터 제대로 된 썰매를 사기 위해 여러 가지 기회를 얕보던 우리 가족은 그다음 겨울에나 썰매를 살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중고를 사느니, 조금 기다려 보자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겨울,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 엄청한 확신에 찬 우리는 썰매를 보자마자 샀다. 그리고 눈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오지 않았다. 눈이 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춥지도 않았다.


작년 겨울엔 그래서 '눈'을 찾아 나섰다. 한국의 강원도나, 유럽의 알프스처럼, 다른 지역들보다 눈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겨울스포츠를 더 즐기는 지역, 독일의 하르츠(Harz)였다.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지역만큼은 아니지만, 베를린에서 차로 3-4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일단 좋다. 당시 우리 집 아이의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코로나로 인한 자잘한 규정들로 인해 어차피 장거리 자동차 여행은 불가능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독일의 중부 하르츠로 눈을 찾아 나섰지만, 그래서 그 큰 썰매를 차에 싦고 떠났지만 부슬부슬 겨울비만 맞고 돌아왔다. 날씨 운도 없었지만 포근한 겨울 날씨에 회색 경치만 감상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창고에서 잠자코 있던 썰매를 드디어 금년에 게시를 했다. 어느덧 4살 반이 된 첫째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생각보다 썰매의 높은 품질에 감탄한다. 나를 포함한 2명의 아이가 앞뒤로 앉아도, 그렇게 대략 100킬로를 훌쩍 넘는 무게에도 끄덕 없이 언덕 아래로 사람을 실어 나른다. 이 정도면 이건 품질의 수준이 아니라 과학의 수준이다.


드문드문 눈썰매를 타는 사람들 중,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썰매를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문득 예전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서 봤던 오래된 나무 썰매들이 떠올랐다. 겉으로 보기에 오래되어 보이는 탓에 고개를 가로저었던 썰매들이 지금도 저렇게 튼튼하게 제 기능을 한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이쯤 되면,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중에 썰매를 포함해도 될 것 같다.


이런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이야기한들 우리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부부가 독일 아이들의 동네 썰매 풍경을 이해하기 힘들었듯 말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심심찮게 하는 말이, '엄마 아빠가 어렸을 적엔'이라는 말이다. 굳이 공원이 아니더라도 동네 비탈길에서 눈이 오는 날이면 썰매를 타곤 했었다. 썰매가 없으면 어른들이 직접 뚝딱뚝딱 만들기도 했었다. 엄마 아빠가 기억하는 그 풍경과, 현재 우리 아이들이 보는 베를린의 이 풍경이 얼마가 유사할지는 모르겠다.


도심 속 공원의 양과 질이 어떻게 삶의 풍경에 영향을 미치는 지를 한겨울의 눈썰매 타는 풍경에서 생각한다. 공원이 많아진다고, 적절하게 눈이 온다고 한국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 동네에서 썰매를 타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베를린에 실내 썰매장을 만든다고 하면 과연 사람들이 이용을 할까 의문이 든다. 아마도 이렇게 우리 부부가 성장해 온 배경과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풍경의 다름 속에 항상 흥미와 즐거움을 발견하려 애쓰며 살아가겠지 싶다.


2022년 봄, 코로나 판데믹이 곧 끝날 것이라 희망하며 봄을 기다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번의 사계절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은 셋에서 넷이 되었다. 더운 여름을 두 번이나 지나고 두 번째 겨울을 지나고 있다. 매년 지나가는 사계절은 닮은 듯 다르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생기는 이야기들이 변화하듯 어른 들고 나이 들며 변화하고 우리 일상의 풍경도 지속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도 변함없이 우리 가족은 다가올 따뜻한 봄을 다시 기다린다. 눈에 뒤덮인 눈썰매장이 다시 푸른 공원이 되어 놀이터에서 뛰어놀 날을 우리 아이들은 기다릴 것이다. 그때쯤 다시 잔디밭에 벌렁 누워 차갑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다시 즐길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



2023년 12월을 마지막으로 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코너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정확히 24번째의 연재동안, 한 달의 한 번 즐거운 고민과 열정 속에 살았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리고 더 좋은 기회에 다시 한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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