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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석영 Jul 14. 2018

학생들과 함께 텍스트를 읽고 쓰고 느끼는 수업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텍스트를 읽고 쓰고 느끼는 수업을 위한 10가지 질문 

교사에게 수업이란?



교사에게 ‘수업’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수업은 교사를 다른 직업 종사자와 구별해주는 지점으로, 교사의 정체성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수업을 하는가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가 어떤 교사인가를 말해줍니다. 때문에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과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수업을 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수업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교사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을 드러내고 이를 학생과 공유하며 서로의 사고를 해체적인 발전 과정으로 위에 놓는 행위입니다. 때문에 교사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과목이 교사 스스로에게, 그리고 학생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교사에게 수업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답들이 존재하고 사라지며, 새롭게 형성됩니다. 때문에 수업은 ‘학행합일(學行合一)’의 과정입니다. 수업은 고민과 실천, 그리고 성찰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종의 ‘프락시스(Praxis)’입니다. 고민이 없는 실천은 있을 수 없으며, 실천 중에 고민과 성찰이 없다면 그것은 독단과 아집으로 연결됩니다.


흔히 교사가 된 지 3년만 지나면 분필 하나만 들고 교실에 들어가도 수업을 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수업을 교과서에 나열된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이는 분명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전혀 다른 학생들과 마주합니다. 같은 사실도 학생마다, 그리고 개인의 사고방식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됩니다. 변하는 다양한 학생들에게 분필 하나로 몇 년전 가르쳤던 사실을 고민없이 똑같이 가르친다면, 그것은 수업이 아니라 독단과 아집일 것입니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는 다양한 변화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거꾸로 수업, 토론 수업, 배움의 공동체, 하브루타 수업, 프로젝트 수업 등 강의 일변의 수업 방식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교육청과 교육부 등이 추진하는 보여주기식의 사업들과 맞물리며, 이 수업 방식들이 지향하는 철학과, 각 교과목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가 무시된 채 방법으로서의 수업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빈 깡통과 같이 말이죠.


위에서 언급한 수업들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점은 수업 속에서 ‘텍스트(Text)’를 보다 ‘텍스트’ 답게 다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텍스트’라고 하면 보통 ‘기록’, ‘글’ 등을 담은 책을 떠올립니다. ‘텍스트’의 사전적 정의는 ‘기호 가운데 특히 구어 혹은 문어 등의 언어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텍스트’의 좁은 의미입니다. 모든 텍스트는 텍스트를 작성한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어있으며, 작성자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여 텍스트를 보다 넓은 의미에서 다시 정의를 해본다면, ‘어떤 인간이나 집단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넓은 의미의 텍스트는 책을 포함한 영상, 그림, 조형물 등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물과 현상들이 하나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학교 수업 속에서 다룰 수 있는 ‘텍스트’의 범위는 상당히 넓어집니다. 보통 수업 속에서의 텍스트는 ‘교과서’와 ‘학습지(활동지)’로 한정되어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마저도  ‘텍스트’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텍스트라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가 내포된 결과물입니다.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은 텍스트에 담긴 의도성을 파악하는 행위임에도 우리는 텍스트에 드러난 명제적 지식들만을 수업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이에 따라 수업이 어떤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고 주입하는 행위로 전락했습니다. 수업 중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수업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의 텍스트는 크게 드러난 텍스트와 드러나지 않은 텍스트, 즉 서브 텍스트로 구분됩니다.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은 표현되어 드러난 부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무의식적으로 누락되어있는 서브 텍스트까지 고려하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와 텍스트의 작성자는 서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고, 서로가 있는 시대와 공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소리내서 읽거나,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텍스트를 읽어내었다는 것은 그 텍스트가 구성된 세계의 흐름과 상황을 파악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을 ‘문해력(literacy, 文解力)’이라고 합니다. 문해력은 이해뿐만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포함합니다. 때문에 텍스트를 읽어 문해력을 기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문해력은 인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또 미래에 나는 어떤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나갈 것인지를 회고와 전망을 통해 성찰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문해력은 어떤 특정 교과의 수업에서만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닙니다. 모든 교과에서 다루어져야만 합니다.



왜 ‘텍스트’을 읽어야 하나요?



텍스트 읽기는 인간의 삶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공감 능력과 감수성과도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요소들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요소들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은 ‘인스턴트’ 글과 맥락으로 소통하는 데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각종 SNS의 짧고 헝크러진 문장과 표현, 그리고 자극적인 영상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SNS의 대화 속에서는 웃음을 나타내는 ‘ㅋ’의 개수가 몇 개인지, 어떤 이모티콘을 쓰는지, 소위 어떤 ‘짤방’을 쓰는지를 보고 상대의 감정을 파악합니다. 학생들은 얼굴을 맞댄 삶에 점차 어색해져 갑니다. ‘ㅋ’와 이모티콘을 구걸하고, 시각적으로 보이는 인스턴트 텍스트들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SNS는 사람들이 검색한 영상이나 자료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이용해 추천 자료와 영상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SNS에 접속하여 접하게 되는 ‘추천 영상’을 무의식적으로 클릭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제공하는 컨텐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이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의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문해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대화를 해도,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려 합니다.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순간에 집중합니다. 교사들은 이런 학생들의 모습의 원인을 생각하기보단 답답함, 심지어는 분노를 먼저 내비칩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가장 기초적인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파괴되어 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텍스트를 읽는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이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반복될 뿐입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수업의 의미를 되찾는 것을 넘어 관계와 삶의 의미를 되찾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문해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원고를 쓸 일이 있어, 학교에 남아 원고를 쓰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석식을 다소 늦게 내려가 먹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계시던 한 선생님께서 무엇을 하다가 늦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다 늦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과 함께 ‘뭐? 글? 선생님이 소설가야? 에쎄이 써?’라는 반문을 들어야했습니다.


저는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 선생님의 반응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쓴다’는 행위를 소설가나 작가와 같은 매우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항상 글을 쓰며 살아갑니다. 직장에서 작성하는 문서도, 친구와 연인에게 보내는 짧막한 메시지도, 통화를 하며 메모지에 끄적이는 낙서도 모두 글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생활이 글과 관련된 일로 가득 차있음에도 글쓰기를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는 우리가 좋은 글을 읽고 쓰는, 텍스트를 다루는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매우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 위에 자신이 인식한 세계를 창조함을 의미합니다.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주장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내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삶의 주체로 살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타인과 자신의 생각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를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느끼면 좋을까요?



 '텍스트를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느끼면 좋을까?'라는 질문은 '학생들이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어떤 세계를 창조해야하는가?'와 같습니다.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합니다. 이는 자신이 당연하게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상당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겨 말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자신의 생각이 정말 맞는지 반문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이 탄생하는 첫 걸음입니다. '나의 생각'은 사실 주입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온 부모님과 선생님이 '틀리다'라고 말하는 사항들에 대해서 성인이 되고나서도 무의식적으로 '틀리다'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국가나 사회 단위에서 생각을 주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의 근원이 어디인지 스스로 물으며, 그 근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 가치로운가를 판단하는 과정입니다. 여러 텍스트들을 접함으로써 자신만의 가치 판단 기준을 세울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상시적으로 다루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통해 세계를 느끼고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읽는 텍스트를 구성하면 좋을까요?



그렇다면, 수업 중에 다루는 텍스트들은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까요? 학생들이 어떻게 텍스트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많은 텍스트들은 주체를 숨김으로써 그 의도를 '객관적'인 것으로 둔갑시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객관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어떤 종류의 텍스트를 다루더라도, 이 부분을 명확히 인지해야할 것입니다. 어떤 텍스트 자료를 수업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에 담긴 의도가 드러나도록 교사가 재구성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숨겨진 의도성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텍스트를 동시에 비교해볼 수 있도록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같은 사실에 대해 여러 계층과 다양한 입장에서 작성된 다원적 관점의 텍스트를 동시에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꼭 여러 텍스트를 이용해 텍스트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텍스트에 숨어있는 주체를 끄집어내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수업 텍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해당 텍스트를 누가, 왜, 어떤 상황에서 만들었는지를 학생들에게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선언적인 문장들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이것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전하기 힘든 성역화된 텍스트를 일컬어 '성경'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조차 글을 쓰는 주체는 드러나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이를 잘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말하고 행한 사실들을 '누가복음', '마가복음' 등 각자가 이해한 형태로 다르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성경이라는 텍스트조차 관점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불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종교적 권위에 의해 이것이 절대화되어 있을 뿐입니다. 수업 속 텍스트는 이러한 권위들이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인터넷 강의를 통해 외국어(영어) 영역을 준비했습니다. 화면 속의 강사가 한 번은 병원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의사가 진료 결과와 약 제조 용어를 계속 영어 단어들로 우리말과 섞어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영어 강사는 그 단어들을 알아들을 수 있어, 그 뜻을 이해했다는 표현을 의사에게 한 뒤 환자들이 자신의 몸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쉽게 말해주는 게 좋을 텐데 도대체 왜 굳이 영어로 표현을 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약간 멋쩍은 듯 의사는 그게 '학술 용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수업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각 교과에서 학생들이 이 정도는 꼭 알아야하는 용어라고 하며, 굳이 어려운 단어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특정 용어의 사용은 권위를 만들고, 그 권위는 도전을 가로 막습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때로는 권력 체계를 구축하는 도구가 됩니다. 만약, 학생들에게 텍스트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이끌어 내려면 텍스트에 사용되는 표현들은 친숙하고 친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학생들이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도록 안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의도가 드러나도록 재구성된 텍스트, 친절하고 친숙한 텍스트가 제공된다면, 학생들은 텍스트에 대해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여러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분명 그렇지 않은 텍스트들에 비해서는 나은 모습을 보이지만 텍스트가 구성된 결과물임으로 해체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지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교사는 학생들에게 텍스트와 함께 무엇인가를 더 제공해야합니다. 그 '무엇'은 바로 '발문'입니다. 발문의 사전적 정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여 그에 대한 대답을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정답이나 깨달음을 얻게 하는 질문기법'입니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도록 함'입니다.


 이 발문은 수업의 목적이자 주제이기도 합니다. 처음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제공했을 때, 학생들은 자신이 이 텍스트를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해당 차시에 제공되는 텍스트를 왜 읽어야하는지 질문의 형태를 통해 목적성을 부여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텍스트 중간 중간, 텍스트를 이해하였는지를 확인하는 발문들과 텍스트에서 확장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발문, 텍스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발문들이 단계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기존의 통념이나 상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현상이나 사실들에 대한 반문의 형태를 갖출 경우, 학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선사시대에 대해 학습을 할 때 '현재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라는 발문을 수업 주제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학생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수업 주제로 설정했는지에 대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안전과 공동체적 가치, 환경과의 공존 등을 이야기하고 선사시대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합리성을 가지고 세계와 소통하며 살아갔던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눈에 보이는 맹수로부터의 위협을 막으면 되었지만, 현재 우리는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원자력 발전소 등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그것이 언제 우리의 삶을 파괴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매우 힘들었지만, 지금은 키보드로, 버튼 하나로 대량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생산한 자원을 나누고 배분하던 사회에서 1:99의 불평등한 사회를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포장하는 현재의 사회로의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지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즉, 텍스트에는 교사로서 제가 느끼고 있던 문제 의식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주먹 도끼 등의 뗀석기 등이 만들어지는 데에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보다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내용도 담았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깨달은 바를 지금처럼 이론으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몸으로 항상 표현하고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텍스트 이후에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던 시대로 갈 수 있다면, 농경과 수렵 등 생존과 관련된 필수적인 지식이 없는 우리가 생존을 할 수 있을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행복을 보장해주었는지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써볼 수 있는 란을 제공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고, 여러 주제의 수업 중 학생들은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로 '현재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였습니다. 다음은 학생들의 해당 주제에 대한 느낀 점을 발췌한 것입니다.



"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을까?'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했던 게 가장 인상에 남는다.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어떤 것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또 느꼈다.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이 토론에서는 '인간'에 초점을 두는지 '인간의 생활'에 초점을 두는지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3학년 2반 우OO학생)



"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를 통해 우리는 과거에 비해 현재가 너무 당연하게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주제를 받아 새로웠고 현재가 더 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느 사회가 발전하였다고 확실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는 많이 편리해졌고 다양한 문화생활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사람들이 현재 사람들보다는 환경속에서 생존지식이나 자연을 지키는 태도·의식 면에서는 발전이 되지 않았고 현재 사회는 돈 없이 살 수 없다. 나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를 통해 '발전한 사회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도 친구들과 토론해보고 싶었다." (3학년 2반 정OO 학생)



"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 주제 자체부터가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많은 점이 느껴졌던 주제였다. 확실히 선사시대에 비해 현재의 우리는 기술적으로 발전한 상태이며, 이에 의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버튼 하나에 의존해 살아가며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하지도 못하는 우리는 정말로 발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식은 저하되지 않은가, 생각해볼 수 있었다." (3학년 3반 조OO)



 학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반응은 고정관념에 대한 성찰이었습니다. 당연시 여기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반문은 생각보다 학생들에게 울림이 있게 다가갑니다. 학생들은 표면적인 주제를 넘어 '발전'의 개념과 정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와 현 시대의 스마트폰을 비교하며 각각이 모두 해당 시대에 인간의 삶을 보다 편하게 해준 혁신적인 도구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사가 직접 의도를 말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단, 이 경우에는 교사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지 않을까?' 등의 하나의 의견으로서 제시되는 형태를 가져야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교사는 하나의 지적 권위자로서 학생들의 사고에 커다란 파급을 미칩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고 쓰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교사의 의견 또한 하나의 의견으로 자리잡게 되며,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하나의 촉진제 정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또한 학생의 텍스트 분석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어야 합니다. 비판적인 읽기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정해진 답을 말하는 데에 익숙해져있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고,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다그치는 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닫고, 입을 여는 데에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학생이 보여준 텍스트에 대한 이해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 칭찬해주고, 보다 의미있는 고민으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질문으로 화답해야합니다. 이 과정은 지난하지만,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지난다면 학생들은 보다 도전적으로 텍스트에 접근하게 됩니다.


 


왜 읽기와 쓰기에는 항상 ‘토론’이 따를까요?



보통 '토론'이라고 하면 우리는 굉장히 거창하고 체계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립니다. 입론과 반론이 존재하고, 끊임없는 설전이 오고가는 과정을 생각합니다. 또 국어시간에 배운 '토론(debate)'과 '토의(discuss)'에 대한 대비되는 정의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텍스트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이듯이, 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다가 재미있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4대 논쟁'이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을까, 찍어먹을까가 끝나지 않는 논쟁으로 남아있으며,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국에 밥을 말아먹느냐, 밥에 국을 부어먹느냐의 논쟁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베이컨을 흐물흐물하게 조리하느냐, 바삭하게 조리하느냐가, 영국에서는 우유에 홍차를 붓느냐, 홍차에 우유를 붓느냐가 비슷한 논쟁거리라고 합니다.


 위는 유머 게시글이었지만, 논쟁과 토론이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다는 좋은 사례인 듯합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선택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은 삶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 때, 개인의 기준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기준이 보다 정당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 과정에서 합일점을 찾아나갑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불가피합니다.


 즉, 토론은 넓은 의미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주고 받는 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합니다. 대화는 내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을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과정이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읽기', '말하기·듣기·쓰기'라는 과목의 이름이 잘 보여줍니다. 학교의 첫 단계인 초등교육에서 읽고, 말하고, 듣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것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임을 체득하도록 함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학교에서 이 과정은 시험을 위한 '보기', '듣기', '외우기', '적기'로 파편화되어버립니다. 텍스트를 읽고, 쓰고, 느끼는 수업을 위해서는 이 파편화된 과정을 다시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으로 복원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을 먼저 마주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주 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게 됩니다. 교사만을 바라보게 종대로 놓여진 책상과 의자는 주변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교실 속에서 교사만을 바라보며 외딴 섬이 됩니다. 고립감은 곧 지루함으로 연결되고, 학생들은 숙면의 세계로 건너가게 됩니다.


 대화가 멈춰있는 모둠에는 교사가 말문을 틔워줄 수 있습니다. 교사는 대화의 촉진자로, 참여자로, 경청자로, 관찰자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모둠 자체를 해체할 수도 있습니다. 해당 주제에 대해 다른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다른 모둠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합니다.


 대화는 텍스트 읽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각자가 느끼고 체험하고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 세계 간의 교집합이 보다 커지고, 보다 다양한 세계의 공존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업에서 '토론'은 필수적입니다.


 대화의 주제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기보다는 대화의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대화는 관심에서 비롯되고, 관심은 질문으로 표현됩니다. 즉, 교사는 학생에게 적절하게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줘야합니다.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학생들은 텍스트에서 느낀 세계를 보다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텍스트 읽기, 쓰기, 느끼기 수업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할까요?



평가는 수업의 연장이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평가는 학생들이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하는 도구입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현재 평가 체계는 다른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줄 세우기'죠.


 그러나 이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상대평가로 등급을 나누고, 결과에 따라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평가의 본 목적을 이야기한 것은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생에게 있어 평가도 하나의 피드백이라면, 이 또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마련해주는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수행평가의 비중을 늘리는 것입니다. 텍스트 읽기, 쓰기 수업을 위해선 상시적인 평가와 피드백이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에 수행평가의 비중을 늘려야만 합니다. 최근 들어 수업-평가-기록의 일체화가 교육부 차원에서 강조되고 있는 추세 역시 이와 부합합니다.(물론, 교육부에서 현장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철학없이 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외치는 강압적인 수업-평가-기록 일체화의 외침은 거북합니다.)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세계관의 형성이 수업의 목표라면, 평가에서도 이를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기한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업 이후에도 교실 밖에서도 숙고를 통해 수업 중 작성한 글을 보완하고,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흥미있는 주제에 대한 수업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선택해서 제출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합니다. 20개 정도의 주제로 수업이 이루어졌다면 10개 정도의 글을 선택해서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평가에서 이야기하는 '객관성'이라는 것도 여러 주관의 합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주관적이라고 여기는 교사의 판단은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성'에 가까운 모습을 가질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사가 잘 작성된 글, 충실한 글과 그렇지 못한 글을 구분하여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학생들이 작성한 글의 유형은 대개 3~4개 정도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명확한 기준을 요구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차후에 계속해서 고민하고 연구해야할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생들이 제출한 글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나 어떤 조건에 저촉되었을때 점수를 다음 급간으로 감점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보편적 인권 가치(평화, 인권, 민주주의, 여성 등 헌법에서 지향하는 가치)에 반하는 표현이나 근거, 주장 등이 글에 드러나 있을 경우' 감점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법적 기준 역시 존재합니다. 교육기본법 제2조를 살펴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에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교육의 목적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거를 제시할 때, 출처가 확실하지 않거나 역사적 사실에서 어긋난 사실들을 제시하면 감점 요소가 됩니다. 이는 글의 신뢰성과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텍스트 읽기, 쓰기 수업과 가장 밀접한 평가는 바로 기록입니다. 입시와 관련하여서도 학교생활기록부의 중요성이 강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바탕으로 담당하고 있는 과목의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학생마다 다른 특성을 발굴하여 이를 기록하는 것은 평가 그 자체입니다. 학생들도 자신들이 제출한 글과 평소 활동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된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고 수업에 임합니다. 입시와도 연관이 되어 있지만, 학생들은 '기록된다는 것' 자체에도 큰 의미를 둡니다. 텍스트를 다루는 수업을 하면서 기록이 가지는 파급력과 중요성을 깨달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위해 학생들이 제출하는 활동지와는 별개로 분기마다 학생들에게 수업에서 느낀 점을 서술식으로 받기도 합니다.


 다음은 학생의 활동과 제출한 기록, 서술식 설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생활기록부의 내용입니다.



" 상시적으로 진행되었던 동아시아사 수업에서 토론자 및 서기, 진행자로 참여함. 토론수업을 통해 동아시아사는 자신과 먼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위에서 일어나며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의 입장에서 동아시아사를 배우고 그 가치를 찾으려 노력함. '우리는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발전한 사회에 사록 있을까?'라는 주제를 통해 선사시대 사람들보다 우리가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 발전의 기준을 무엇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 한 뒤, 선사시대 사람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거나 미개한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합리적으로 대응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라고 여김. 이후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발전'했다기보다는 '변화'했다고 생각하게 됨. 평소 교사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신도 미래에 학생들과 다양한 주제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수업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느낌. "(1,458byte, 2학년 3반 주OO 학생)



텍스트 읽기, 쓰기, 느끼기 수업에서 교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텍스트 읽기, 쓰기 수업을 통해 성장할까요? 다소 맥이 빠지는 대답일지도 모르지만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건 교사인 내가 맡고 있는 수업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서 학생들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신념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수업 중 학생들이 가끔씩 보이는 자립적인 모습들과 '인간'에 대한 이해 양상은 끊임없는 동력이 됩니다. 아마 좋은 수업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 수업에 있어 각기 노력하고 있음을 깨닫고 함께 만들어가는 수업인 것 같습니다. 흔히 '교학상장'이라고 표현되는 오래되고 상투적인 문구를 직접 체험하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것. 그것이 교사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수업을 진행하며 느끼는 고통 속에서 만나는 희망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생들이 텍스트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가졌던 사례들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례 1. "선생님, 지도 위의 화살표 방향이 이상해요."



한 번은 한·일 교류를 나타내는 지도에 대해 이상한 점을 찾아보는 활동을 했었다. 지도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를 향해 큰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었고, 한반도의 삼국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들의 이름이 화살표 밑에 적혀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지명이나, 도시의 위치 등이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날카로운 학생 몇 몇은 화살표의 방향에 의문을 품었다.


 


“문화라는 건 교류가 일어나는 건데, 지도는 한반도에서 일본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뻗어만 있어요.”



 그럼 지도가 왜 이런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 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다른 학생이 대답을 했다.


 


“우리가 옛날에는 일본보다 발전되어 있었고, 일본은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해나갔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



 학생들은 지도도 하나의 텍스트이며, 저자의 욕망과 의도가 담긴다는 사실을 수업이 거듭되며 깨닫고 있었다. 즉, 학생들이 점차 텍스트의 객관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점차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성은 소위 '객관식'이라고 불리는 선다형 문항에도 담겨 있었다. 한 시도교육청 주관 모의 학력평가 문제를 학생들에 게제시했다. 이 문제에서는 백제 영역에서 일본 열도로 화살표가 그어져있고, 이 화살표에는 (가)라는 명칭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가)에 대한 옳은 설명으로 '선진 문물의 전파가 수반되었다.'라는 선지가 제시되었다. 학생들에게 의도성이 강하게 담긴 표현 두 글자를 찾아 표시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진'이라는 두 글자에 표시를 하였다. 우리가 객관적인 지식을 평가한다고 여기고 있는 객관식 문항도 누군가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용어 사용을 통해 강한 의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도 어렴풋이 느낀 듯 했다.



사례 2. "선생님, 애국이 뭔지 모르겠어요."



수업 중 러일전쟁에 대해 다르게 받아들이고 행동한 두 명의 일본인에 대한 텍스트를 학생들에게 제공하였다. 두 인물은 고토쿠 슈스이와 노기 마레스케.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주의자. 러일전쟁 당시 헤이민 신문에 러일전쟁은 양 국민 모두를 죽이는 일이며, 우리의 적은 제국주의라고 외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자국만 사랑하는 애국이라는 것은 사실 일부 군국주의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나중에 반역죄로 사형된다.


노기 마레스케. 러일전쟁을 이끌던 고위급 군인. 사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인 사상자가 많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노기 마레스케가 전쟁에서 죽은 자신의 두 아들 영정과 함께 귀국을 하자 그는 일순간 영웅이 되었다. 다이쇼 천황이 죽자, 아내와 함께 따라서 자결하여 현재 그를 모시는 신사도 따로 있을 정도이다.


둘의 삶에 대한 글을 읽고 어느 쪽이 일본의 입장에서 더 애국에 가까운지를 물었다. 한 학생의 발표와 이후 나와의 대화이다.


" 왜 고토쿠 슈스이가 더 애국적이라고 평가했니?"


"음. 솔직히 '애국'이 뭔지 모르겠어요."


"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애국'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애국하면 그냥 애국가 열심히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태극기 흔들고 이런거 밖에 생각이 안나요. 정말 더 솔직히 애국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데 왜 이런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 학생의 지적은 정확하다. 애국심이 우리가 반드시 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가져야할 마음인가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한다. 사실 고토쿠 슈스이에게 애국이라는 평가를 내리면 그게 모욕일수도 있겠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애국이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할 가치인가, 애국이 지향해야할 가치라면 어떤 모습이어야할까. 이번 학기 끝나면서 학생들이 이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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