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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라쏭짱 Dec 03. 2019

내 머릿속의 지우개

입에서 맴돌다가 나오질 못하는 단어들

내 머릿속의 지우개


  장동건 –고소영. 원빈-이나영. 지성-이보영. 비-김태희.  내가 기억해야 할 부부 연예인 이름이다. “걔 있잖아! 왜 재랑 결혼한 애!” “누구?” “아, 왜~” 이런 식의 친구들끼리의 대화 끝에 겨우 생각나서 맞춰지는 이름들. 언제부터인가 이름이 입속에서만 맴돌다가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오늘도 남편 친구 얘기가 나왔는데 ‘이준석’으로 시작해서 결국 이름은 ‘김석주’로 밝혀졌다. ‘콜라, 세탁기에서 꺼내먹어’라고 하던지. 냉장고, 베란다, 에어컨, 뱅뱅 돌다가 말하고 싶었던 건 선풍기라든지. 단어를 저장해두는 뇌의 어느 부분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아득한 느낌이 참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영어단어라서 헷갈린다고 생각했다. 누가 우리 자동차 이름을 물어보면 쏘렌토,카니발, 싼타페.. 하여간 3글자라고 얘기하면서 남얘기처럼 같이 웃었 다. 그러다가 병원을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리모컨 때문이었다. “자기야, 나 핸드폰 좀.  채널7에서 지금 재미있는 거 해.” 남편은 내 손위에 리모컨을 올려주며 “자 리모컨. 핸드폰 아니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말해” 그날따라 정색을 하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전에는 입에서 맴돌거나, 말하면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리모컨은 남편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쏟아지고 나서야 내가 잘못 말했다는 것이 인지가 되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한 박자 늦게, 그것도 누군가 꼭 집어주어야 알게 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열이 확 오르고, 잠이 안 오고, 배가 나오고, 이유없이 우울해지는 등 많은 갱년기 증상들보다 말을 잃어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부인과 의사선생님은 갱년기가 시작된 지 한참도 더 되었는데 왜 이제야 왔냐면서 세달 치의 약을 지어주었다. 무엇보다 약의 배합이 아주 맘에 들었다.

          호르몬제 + 혈액순환개선제 + 뇌 신경전달작용향상제 + 칼슘제.


  나는 말 잘하는 아이였다. 학교 다닐 때 통지표에는 ‘청산유수’라는 단어가 의례 들어가 있었고 임기응변에 능하다(이게 칭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표현도 등장한 적이 있다. 첫 소개팅을 한 날은 2시간 만나고 나서 친구들에게 3시간동안 무용담을 들려준 적도 있었다.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문제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짝사랑하던 남학생에게도 얼굴보다 아파트 우편함에 꽂아놓은 편지로 호감을 샀고, 중학교 도덕선생님은 ‘송정은 나와!  재미있는 이야기좀 해봐“ 그러면서 수업을 때우신 적도 자주 있었다. 덕분에 ’주말의 명화‘나 ’전설의 고향‘은 주된 나의 레퍼토리였다. 열심히 보고 나서 썰을 풀면 진짜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고정 팬들이 쉬는 시간마다 모여들곤 하였다.  


  갱년기 약 먹은 지 어느덧 일 년이다. 이 약 만이 나를 예전의 명성으로 되돌려줄 것이라 믿고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먹었는데 얼마 전 수업시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건이 생겼다. 칠판에 ‘구조주의’라고 적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이들에게 “이걸 꼭 기억해야 돼” 하면서 밑줄을 다시 긋는데 어색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슬쩍 교탁으로 내려가 교재를 보니 ‘구성주의’였다. “잠깐만, 잘못 썼네! 구조주의 아니고 구성주의야.” 누군가 받아 적었으면 어떡하나 싶으면서, 황급히 지우고 다시 썼다. 교탁과 칠판이 겨우 두걸음인데 그 사이에 ’구성‘이 ’구조‘로 바뀐 것이다. 마침 병원 정기 검진이 며칠 후였다. “선생님! 약 먹은 지 일 년이 되니까 이제 약이 잘 안 듣는 것 같아요. 제가 얼마 전에 ‘구성주의’를 ‘구조주의’라고 썼어요.” 나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을 했다.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며 감정을 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냥 노화입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듣고 난 후엔 차라리 후련하다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노화란다. 이제 어쩔거야!.  ‘그거, 이거, 저거, 쟤, 얘, 거시기’ 등 3인칭 대충(?)명사로 내 정교했던 어휘들은 대체될 것이다. ‘장동건-고소영. 원빈-이나영. 지성-이보영. 비-김태희’ 다시 한 번 되놰 본다. 더 이상 연예인들의 결혼은 없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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