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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Nov 12. 2023

당신의 항해에서 '스콜'을 만난다면

나의 준비 - 1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좋아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돈 걱정을 하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평생 하며 즐길 수 있는 삶, 이미 나는 내 삶을 완성시켰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풍 속의 항해


항해하면서 심심찮게 마주치는 스콜의 모습


 항해를 하다 보면 가끔 저 넓은 수평선을 따라 어두컴컴한 먹구름이 모여있는 곳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보인다. 푸르디푸르던 하늘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유럽을 향해 항해하던 도중, 내가 가려던 방향을 기준선으로 하여 왼쪽 편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호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반대로 오른편은 그런 반대쪽 상황에 무색하게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했다. 항해사들은 보통 이렇게 일시적으로 좁은 곳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큰 호우가 내리는 것을 '스콜(squall)'이라 표현한다.


 그때의 그 스콜은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내 앞의 왼편을 가로막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마주 오는 선박이 있었기에 오른쪽으로 틀어 스콜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이대로 계속 전진할 경우 스콜과 이동방향이 비슷해지기에 오히려 그 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약간 왼쪽으로 꺾어 스콜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타수를 시켜 왼쪽으로 선수를 틀고 나는 숨죽여 앞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스콜 속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주변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매우 화창했음에도 앞은 마치 뿌옇게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그러다 스콜의 경계에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갑자기 태풍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속도의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스콜 속에 들어가면 사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태까지 수많은 안개와 비바람을 경험했지만 그 정도로 사방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바로 앞에 실린 컨테이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오로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레이더뿐이었다. 순간 두려웠다.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타이머를 재고는 그 시간만 지나면 다시 날씨가 마법처럼 화창해질 거라고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항해는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스콜을 뚫고 가고자 하는 선택을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다가오는 배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위험했고, 그렇다고 멀리 돌아서 가기에는 기존에 계획했던 방향을 너무 벗어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렇다고 애매하게 피하려고 했다간 오히려 스콜을 더 오래 맞아야만 했으니 차라리 내가 직접 스콜을 맞서서 정중앙을 뚫는 편이 나았다.


 이처럼 배는 선택의 연속이다. 앞의 어선군을 피하든 태풍의 영향권을 피하든 간에 항해를 할 때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그 선택의 마지노선은 보통 상대 선박을 인지한 시점부터 20분 내외이므로,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항해할지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한 번 선택했다면, 많은 경우 그 선택을 번복하기 어렵다. 이미 어선군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면 다시 억지로 빠져나오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동반하고, 바다를 쏜살같이 휩쓸고 다니는 태풍의 예상 진로를 앞질러가는 선택을 했다면 다시 뒤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거기서 수반되는 어려움은 그때그때 헤쳐 나갈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가끔 내 예정 항로를 벗어날 때도 있지만 결국 내가 도착하고자 하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에 도착해 있다. 꼭 어선군은 내가 예상했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해 있고, 가끔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앞을 오롯이 집중해서 그때그때의 위험을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 목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스콜을 만난다는 건


 마치 항해를 할 때 목적지와 예정 항로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다. 누구에게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종잣돈을 모으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올려 승진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목적들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방향이 있다. 지금의 상황에선 반드시 이 방향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방향이 정해진 순간부터 우리에겐 예상치 못한 스콜이 밀려온다. 그렇게 그 스콜 속을 비집고 들어가게 되는 순간, 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배는 쉴 새 없이 요동치고, 하늘은 거친 비바람을 쏟아붓는다.


 그렇다고 그렇게 스콜을 만났다고 해서 방향을 완전히 꺾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는 이상 거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스콜을 지난다는 것이 가끔은 사무치게 외롭고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통과 의례이자 필요한 관문인 것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삶이 막막해지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사람이 어떤 곳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간에 말이다. 스콜은 정말 공평하게도 사람들을 여기저기 쏘다니며 우리를 괴롭힌다. 실제로 스콜은 인도양, 대서양, 지중해를 불문하고 어디에든 있다.



 일반적 비관주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비관주의로 일관하는 사람은 어느 집단에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과는 연관이 없는 듯하다.


 만약 의식주도 쉬이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상황에 있다거나 매우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 그 사람이 비관적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크게 이상하다고 반응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탓인 것 같다. 이에 반해, 부러워하는 조건에 있는 사람이 똑같이 비관적이라면 반응은 사뭇 달라진다.


 누구는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건물주이면서 월세를 따박따박 받으며 매일을 놀고먹으며 살다가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느껴 정신과에 상담을 받으러 찾아간다. 또 다른 누구는 강남에 병원을 차려 꽤나 짭짤한 수입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음에도, 행복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불행하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은 대체 무엇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거지?' 하며 의문을 표하거나, 그저 배가 불러서 그렇다며 비아냥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그 사람이 불행하다면 그저 불행한 것일 뿐이다.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시선은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저 부럽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에만 잠깐 기분이 좋을 뿐이지 결국엔 다시 불행의 늪에 빠지고야 만다.


 그게 건물주가 되었든 의사가 되었든 우리가 선망하는 다른 조건이 되었든지 간에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겐 그 사람 나름의 '스콜'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선 주변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자유시간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인생은 누추하고 비참한 삶이다.



 아니, 돈도 많이 벌고 여행도 많이 가잖아요?


 휴가를 받아 가끔 나의 직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앞의 건물주나 의사를 보는 시선과 비슷했다. 누구는 그렇게 긴 휴가를 받으면서 그렇게 고소득인 곳이 있을 수가 있냐며 의아해했고, 다른 누구는 대체 직장을 다니는데 어떻게 그렇게 휴가가 길 수가 있냐며, 자기는 연차를 힘들게 모아 한 번에 써도 휴가가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라고 한탄했다.


 맞다. 분명 나는 처음 항해사로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 지 1년 남짓이 되는 시간 동안 남부럽지 않은 돈을 벌고 있었고, 일하는 틈틈이 여기저기 길게 해외여행을 다니며 나름의 고소득과 워라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승선을 마치고 휴가를 받았을 때, 나는 약 일주일 가량을 홍대 근처에 숙소를 잡아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잠깐 바람을 쐬러 밖을 나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건물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미친 듯이 공허한 감정을 느꼈다.


 배 위에 있는 동안 때론 반복적이고 때론 갑작스러운 이벤트를 처리하면서 매일을 분주하게 살고 있던 승선 기간과 달리, 긴 휴가기간에 걸쳐 육지에 있는 동안 나에게는 그 어떤 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한 마디로 나는 육지에 있어서 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 다들 이렇게 분주히 움직이는데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분명 내게 주어진 일을 전부 마치고 당당히 휴가를 받아 나온 것임에도 내 그 역설적인 감정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주변 쓰레기를 주워가는 환경 미화원, 화장품 가게에서 분주히 상품 진열을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단어장을 보며 독서실로 향하는 고등학생, 길거리에서 순대를 파는 포장마차 아주머니까지.. 그들에게는 전부 당장 주어진 '일'이 있었다.


 나는 앞서 나를 부러운 눈으로 선망하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때 그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 나는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당장 내일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렇게 그들의 삶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만의 '스콜' 속에 들어온 셈이었다.



 오히려 당신들이 부럽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당시 대기업을 포함한 국내 전 기업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영업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큰 기계 속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했을지언정 나는 그 중심에서 내게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있었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밤을 새워 가며 몇 달간의 일을 마친 나에게 그 장기간의 휴가는 매우 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휴가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지금 당장 자신의 일이 있는 삶에 어떤 불만을 느낀다는 것인지, 육지에 있으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치킨집에서 치맥을 할 수 있고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뽑아먹을 수 있는 삶에 왜 불만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를 승선하는 동안 조리장이 해주는 치킨, 순두부찌개나 돈가스 모두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집밥이나 밖에서 사 먹는 프랜차이즈 음식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그리고 배에서 커피 스틱을 넣어 만든 간편식 아메리카노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드등이 켜진 분위기 맛집 카페의 프라푸치노에 비견할 바가 못된다. 그런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떤 불만을 느낀다는 것인지 내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육지에서 마음대로 치킨을 시켜 먹고, 아메리카노를 뽑아 먹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음 날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당신은 어떤 감정이 드는가?


 아마 당신은 단 한 번도 그런 당연한 일에 굳이 의미 부여를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이후로 당신은 안다. 그런 당연한 일조차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둘도 없이 부러워할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각자가 각자의 스콜을 마주할 때


 내가 항해사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의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배를 타는 동안 뭔가 한참 부족한 음식들에 항상 아쉬움을 느낄 것이고, 휴가를 지내는 동안 내게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족함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실제로 내가 홍대에서 느꼈던 그 공허한 감정은 당시에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매우 강력하고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당신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각자 나름의 스콜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들은 내가 항해사를 함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만 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과제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은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느낄 수 없을지언정 당신의 환경이 주는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들을 감내하고 견뎌야만 한다.


 평생을 놀고먹으며 죽을 때까지 행복할 줄만 알았던 건물주가 불행을 느끼듯,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의사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듯, 나도 당신도 각자가 자신만의 삶의 항해를 누비며 전혀 다른 모양의 스콜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왜 나만 스콜에 들어왔냐며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왜 하필 이때 스콜에 들어왔냐며 불평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 당신이 아무리 비교하고 불평하며 불행해해 봐야 결국 스콜은 내린다.


 그렇다면 스콜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뿐이다.



단 하나의 해결책


 앞에서 이야기했던 건물주의 경우, 자신이 불행을 느꼈던 이유는 자신이 사회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월세를 받아 자신의 쾌락을 위한 소비에만 치중했던 그는, 자원봉사나 기부를 시작하고 적으로만 치부하던 세입자들에게 선처를 베풀기 시작하며 조금씩 삶에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강남에서 개원의를 하던 의사의 경우, 어릴 적 그저 성적에 맞추어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의대를 진학한 것뿐이고 진료하는 것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디자이너를 꿈꿨던 기억을 살려 자신의 병원을 예쁘게 꾸미는 것에 흥미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더욱 많은 환자들을 유입시키고 그 스스로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건물주도 개원의도 건물을 팔아넘긴다거나, 병원을 때려치우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의 환경은 바꾸지 않았지만 그를 보는 자신의 시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고 이는 삶의 비관에서 긍정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우리는 그렇게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스콜 속에서도 마음가짐을 달리 먹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행동 또한 바꿀 수 있다. 앞으로 쓰게 될 글은 내가 이와 같은 나만의 스콜을 어떻게 헤쳐나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본 글은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1화로 작성된 글입니다.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프롤로그

 https://brunch.co.kr/@subakk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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