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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Mar 22. 2024

나는 세상에서 없는 존재였다

나의 준비 - 2

 항해를 하다 보면 가끔 맑은 하늘 저편 구석진 곳에 새까맣게 칠한 듯한 먹구름이 보인다. 맑게 갠 날씨 속에 원통형으로 둘러싸인 그 거뭇한 경계 안을 들어가면 갑자기 다른 세상인 것처럼 미친듯한 폭우가 쏟아진다. 항해사들은 보통 이렇게 좁은 곳에 일시적으로 강한 바람을 동반한 큰 호우가 내리는 것을 '스콜(squall)'이라 표현한다.


 내가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던 이 스콜이라는 친구는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우리에게 절대 미리 통보하지 않는다. 갑자기,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날씨만 보면 전혀 비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화창한 날씨지만, 그저 어디선가 불현듯 자기 안에 조용한 소용돌이를 몰아치며 배를 향해 조용히 다가온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첫 승선을 마치고 난 직후, 미리 잡아둔 서울 홍대 근처의 숙소로 향했다. 코로나 시절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진 곳에서 격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방역 택시를 타고 부산 컨테이너 터미널에서부터 서울 홍대로 향하는 길에, 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후배들과 입이 아프도록 이야기했다.


 그 당시 코로나로 인해 선원 교대가 어려워 무려 8개월 반을 승선해 있어야만 했는데, 그 기간 동안 주말이나 명절을 불사하고 매일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으므로, 하루만이라도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던 차였다. 그렇기에 숙소에 들어가서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마음껏 잘 수 있는 하루, 조금 늦잠 자도 일에 늦었다며 전화가 오지 않는 하루, 점심과 저녁을 좀 늦게 먹어도 아무도 왜 혼자 늦게 먹냐며 핀잔을 주지 않는 하루, 그 단 하루가 난 너무도 고팠다.


 내 계획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계획, 그저 도착해서 씻고 옷만 간단히 갈아입은 후 아무것도 안 하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난 그렇게 소박하게 육개장 작은 컵과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는 숙소에 도착했다. 컵라면의 뚜껑을 살짝 뜯어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맥주 캔을 똑 따서 주방 식탁에 앉았다. 조용한 주방, 똑딱거리는 시계와 맥주 거품의 자글거리는 소리. 그 순간 넷플릭스가 켜지더니 그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대만족이었다. 다 익은 컵라면 뚜껑을 벗겨 낸 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컵라면을 흡입하고 하염없이 TV를 보았다. 물론 이런 소박한 야식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다음 날에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누구도 날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은 적어도 앞으로 3개월 간은 지속될 예정이었다. 길다면 긴 시간, 앞으로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명확한 윤곽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히려 그렇게 계획이 없어도 된다는 사실이 8개월을 계획적으로 살아왔던 나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 정도가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푹 쉬며 휴식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 창문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역시 홍대 한복판이라 그런지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지나가는 남성들, 한껏 꾸민 채 길을 지나가는 여성들, 양복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분주하게 걸어가는 직장인부터 종이더미를 담은 리어카를 짊어지고 가는 어르신까지. 거리는 무척 부산했고 복잡했지만, 그들 모두는 앞을 보고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고는 꿈에도 모른 채,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시간에 늦지 않게 무던히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물론 격리기간이라 어쩔 수 없이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 작은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때까지 무언가 할 일이 있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내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일도 없었다. 이 기간은 회사에서 내게 준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답례. 이 기간 동안은 그 무엇을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약속. 그것은 나에 대한 배려였고, 누구나 부러워할 힐링 타임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극도로 공허해지고야 말았다. 저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밖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하고 있었지만 나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저들은 그게 어떤 곳이 됐든지 간에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존재였다. 내일이면 나와 달리 직장으로 출근해야만 했고, 학교를 가야만 했다. 이와 달리 나는 내 역할이 있는 곳이 없었다. 나에겐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고, 일정도 없었으며 책임도 없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가 없었다.


 필요가 없는 존재.


 나는 마치 세상에서 내가 없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본 글은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2화로 작성된 글입니다.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1화 : 당신의 항해에서 '스콜'을 만난다면

 https://brunch.co.kr/@subakk96/74

 프롤로그

 https://brunch.co.kr/@subakk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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