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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Apr 01. 2024

냄비가 흘러넘친다고요!

나의 준비 - 3

 항해를 하다 보면 가끔 맑은 하늘 저편 구석진 곳에 새까맣게 칠한 듯한 먹구름이 보인다. 맑게 갠 날씨 속에 원통형으로 둘러싸인 그 거뭇한 경계 안을 들어가면 갑자기 다른 세상인 것처럼 미친듯한 폭우가 쏟아진다. 항해사들은 보통 이렇게 좁은 곳에 일시적으로 강한 바람을 동반한 큰 호우가 내리는 것을 '스콜(squall)'이라 표현한다.


 내가 이전에 설명했던 이 스콜이라는 친구는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우리에게 절대 미리 통보하지 않는다. 갑자기,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날씨만 보면 전혀 비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화창한 날씨지만, 그저 어디선가 불현듯 자기 안에 조용한 소용돌이를 몰아치며 배를 향해 조용히 다가온다.



1화) 당신의 항해에서 스콜을 만난다면

https://brunch.co.kr/@subakk96/74


2화) 나는 세상에서 없는 존재였다

https://brunch.co.kr/@subakk96/76




위로조차 소용없다


 그렇게 스스로가 순간 심각할 정도로 무가치하다고 느껴진 때, 나는 굉장한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욕구가 무의식 속에 있던 탓인지 나는 주변에 있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불안감은 나 혼자만의 힘으론 도저히 감당할 정도가 아니라고 느꼈던 것이다. 자주 연락하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몇 달간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들까지, 연락이 닿는 대로 전화를 받으면 간단한 안부 인사 후 조심스레 나의 상태를 표출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연락이 닿았던 사람들 모두가 정말 상냥하게도 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위로해 주었다. 이런 나를 위해 시간을 쏟아준 이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네 탓이 아니다, 열심히 일 했으니 좀 쉴 때도 되었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다, 지금 쉬는 것은 정당한 것이니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다, 위로의 방식과 조언의 내용은 모두 같은 듯 달랐다.


 이렇듯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위로를 건네준 사람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그 모든 위로가 나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말들이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다. 이미 스스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절감한 상태에서 아무리 옆에서 “그래도 너는 필요한 존재야”라고 백 번 외쳐 본들 순간은 기분이 좋았을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불안한 상태로 돌아왔다. 특히나 가장 의미 없게 들렸던 것은 그때 접한 수많은 힐링 영상과 힐링 도서들이었다. ‘너는 너 자체만으로 이미 완전한 존재야’라든지, ‘넌 이미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와 같은 케케묵은 힐링 표어들이 막상 보는 순간에는 그런가 싶다가도 짧은 시간 안에 다시 내 속은 부글부글 들끓었다.


 모두 설득력이 없었다. 나도 누가 내게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가족들에게는 존재만으로도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필요의 유무는 단순히 가족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게는 사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더욱이 나보고 이미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 작가나 유튜버에게 찾아가 그 말의 이유를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도 자신에 찬 말투로 그런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러면 십중팔구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까요”나 “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요”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답변을 내놓을 게 뻔했다. 거기에 나는 당장이라도 “그쪽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듯 저도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에요”라든가 “사람이라고 다 그렇진 않아요”라고 호기롭게 반박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보기에 그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신만의 신념에 불과했다. 자기계발서의 그런 요상한 믿음의 근저에는 소위 ‘뇌피셜’에 불과한 근본 없는 모래성 같은 이유들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후 서술하겠지만 이 생각의 흐름이 되려 나중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냄비가 부글부글 끓는다..!


 내 안에 있는 문제들을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채, 나는 훈련소로 향했다. 훈련소 기간을 휴가 기간과 별도로 계산해 준다고는 했지만, 안 그래도 방해받기 싫었던 꿀 같은 휴가 기간 동안 몇 주간의 지루한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물론 우리나라 남자라면 누구든 가볍게 거쳤던 관문이었기에 군말하지 않고 진해 해군훈련소에 입성했다.


 나는 당시 승선근무예비역 제도라는 것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산업근무요원과 같이 일반 회사에서의 업무 경력을 3년을 채우면 군 복무로 산정해 주는 제도로, 군 현역을 입대하는 대신에 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그 군사훈련을 다 마치고 나면 바로 사회로 나가 승선 경력을 쌓게 된다.


 그렇게 누구든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훈련소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그 안에서도 내 속은 여전히 치열하게 끓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불을 올린 것을 깜빡하고 방치된 냄비와도 같이, 내 안에 있는 불안감은 미친 듯이 끓어오르며 내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변 훈련 동기들도 내게 따로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분명 내 밖으로 분출되는 그 불안을 인지했을 것이다. 조금 둔감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과 별반 차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느꼈을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눈치를 챘을 터였다.


 나라는 냄비는 그때부터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첫 번째는 내 안의 불안이 더 이상 넘치지 않도록 일단 불을 끄고 일정량을 덜어내야 했으며, 두 번째는 그 허름한 양은 냄비같이 좁디좁은 내 그릇의 크기를 더 키워야 했다.


 그런 필요성을 스스로 절감한 나는, 그렇게 훈련소에서 틈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아 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한 자기 탐색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본 글은 항해사 어름의 매거진 <당신은 행복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3화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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