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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연상 Jun 05.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무의지적 기억’

코치가 된 은퇴 CEO : 인생 에세이(6)

2019년,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을 완전 은퇴한 뒤, 나는 1년간 미국 유학 체험을 했다. 그 다음해인 2020년 미국 유학 체험 1년을 마치고 귀국하여 1년을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잡느라 헤맸다.

그 다음 해인 2022년에는 1년 동안 동호인 5명이 모여 번역판 기준으로 길이가 6,000 페이지나 되고 문장이 난삽하기로 소문난 소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엮은이 김희영,  간행 민음사)’ 12권을 매달 1권씩 읽었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도 찾게 되었다.


최근 3년 간은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조직에 속하여 바쁘게 살아오다가 은퇴를 한 뒤, 이제 독립인으로서의 나에게 집중하여 시간을 보내며 생각을 집중하는 삶의 단계에 접어 들게 해준 시간이었다.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들과 그 기억들이 불러오는 내 삶의 모습들이 계속 생각에 몰려 왔다.

그런 즈음에 우연히 후배로부터 ‘소수의 동호인들끼리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제목을 들어봤고 언제 한번 읽어봤으면 싶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읽지 못하는 소설을 같이 읽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 책이 바로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고 이 책을 읽어보자고 하는 배경에는 이 글이 ‘작가의 실제 삶에서 우러나온 무의지적 기억을 쓴 글’이라는 것에 있었다.

무의지적 기억. 생소한 표현이지만 듣자마자 그 의미가 내 머리에 꽂혔다. 아마도 당시 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던 청춘의 시절의 기억이 이러 하구나 하는 짜릿한 느낌이었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내 인생을 돌아보게 해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에 앞서 ‘프랑스어 소설의 번역은 쉽지 않은가 보다’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걸 반증하듯 이 책은 이미 첫 구절을 두고 여러 번역자가 각기 다른 표현을 쓰며 이를 두고 이런저런 논쟁이 되어 왔는데, 그 구절의 번역들이 이러하다.

A 번역가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B 번역가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C 번역가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마치 카뮈의 이방인 첫 구절의 번역을 두고 벌이는 논쟁과 흡사하다.

A 번역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B 번역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C 번역가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뭐, 이런 논쟁은 열외로 하더라도 번역자들이 친절하게도 짤라 주지 않았다면, 한 문장의 길이가 계속 이어져 주어에 해당하는 술어를 찾기도 어려운 지경의 글이었다. 또 어떤 한 장면에서는 소설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마르셀의 기억 소환이 끝없이 연결되어 몇 페이지씩 이어져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이 책을 읽기 위해 여러 참고 서적을 살펴봐야 했다. 고백컨데 중간부터는 눈이 점점 침침해져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결국 모임 리더의 도움으로 대충 스토리와 문맥을 더듬어 가게 되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무릇 책이란 처음 읽을 때 제대로 읽어라 했다. 살면서 다시 열어 보기가 흔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내가 그러하다. 그 때 제대로 안 읽었으니 다시 읽어보자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웃음) 어차피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서 이 소설의 줄거리나 읽어 내기 위해 도움을 받았던 책들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내게 미친 영향은 내가 자연스럽게 내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되는 시점에, 때때로 내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현재 내가 마주치는 상황들이나 마주치는 물건들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를 맞게 되면서,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마음을 짐작하며, 때론 슬픔이 때론 기쁨이 느껴지는 감성의 회귀와 잃어버린 기억의 회귀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으니까.




마르셀이 할머니와의 추억이 무의지적 기억으로 밀려왔듯, 나도 어머니와의 인연이 무의지적 기억으로 밀려온다.


마르셀이 청년이 되어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내놓은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으려는 순간, 어릴 때 어머니가 준 마들렌와 홍차와 겹치면서 기나긴 기억의 얘기를 쏟아 낸 것처럼, 나도 제법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 따뜻한 봄의 햇살을 맞으면, 어머니와의 인연이 무의지적 기억으로 밀려 온다.

나의 어머니는 육순, 칠순에도 잔치를 원치 않는다 하셨다. 자식된 마음에 팔순 때는 꼭 일가 친척을 불러 식사라도 하자고 권했으나 그마저 마다하셨다. 그래도 뭔가 의미 있는 기념 이벤트가 있어야겠다 싶어, 어머니께서 평소 불교 공부를 하시며 경전의 구절을 중학생 공책에 필기 하신 것, 당신의 생각을 적어 놓으신 글들을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동네 문구점에서 인쇄, 바인딩, 표지 디자인을 하여 50여 권을 만들었고, 어머님 팔순 때 가족, 친척을 포함하여 어머니를 아시는 분들에게 증정하였다.

나는 그 어머님 문집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웁니다. 부모님은 지식과 가치관 뿐만 아니라 사람이 나이 들어 가면서 지녀야 할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부모가 늙으시기 전에 일찍 돌아 가시거나, 늙어 돌아가셔도 자식이 젊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 합니다. 자식이 나이 들고서 부모님이 늙어 가셔야 인생의 마무리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고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저는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남자가 늙어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근래에 건강이 약해지심으로 고생하고 계셔서 옆에서 지켜보며 인간의 늙어가는 과정을 새삼 배우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궁극적으로 기댈 곳은 오직 자연 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최근 생활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어머님의 생각이 법정 스님의 그것과 같음을 느꼈습니다.


서문에 담았던 나의 이런 마음을 생각하며 책 표지를 디자인하면서 뒷표지에 어머니의 이런 글을 써 넣었다.


따스한 햇볕에 온 몸을 쪼이고 앉았으면 몸이 편안해지고,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 지면서 화두일념이 된다. 자연은 몸과 마음을 함게 치유할 수 있는 위대한 스승이다.

 - '제3부 지금의 나' 중에서 -




이렇게 나의 무의지적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와 나의 사람들의 시간들이 파도처럼 손 쓸 수도 없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내 머릿 속에 밀려 들어오는 요즘이다.

나에게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인간상들과 문학, 음악, 그림에 대한 얘기들도 소중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머리 속에 가득했을 기억들이 자신의 의지의 도움 없이 마구 떠올랐을 모습이 내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나에게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인간상들과 문학, 음악, 그림에 대한 얘기들도 소중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머리 속에 가득했을 기억들이 자신의 의지의 도움 없이 마구 떠올랐을 모습이 내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그 절절함을 느끼며 되려,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 보게 됨에 감사하며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했던 1년은 불현듯 이렇게 떠올려 본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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