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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May 17. 2021

산티아고에서의 24시간

미션 수행 그리고 칠레의 9.11

미션수행의 도시

푸콘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넘어왔다. 오랜만에 동행 없이 혼자가 됐다. 그간 동행들 덕에 긴장을 늦췄는데 다시 홀로 현지인들과 때때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단 생각에 한편으로 여유로워졌다.


산티아고는 여행 중 꼭 들러야 하는 도시였는데, 첫 번째 이유 비자 발급었다. 볼리비아는 남미 여행 중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한 국가다. 단기 여행자라면 한국에서 받아오겠지만, 나같은 장기 여행자는 볼리비아 대사관이 있는 도시에 들러야만 한다. 일정과 동선을 고려해 고른 게 산티아고였다. 


숙소에서 필요한 서류를 뽑고 시간이 남아 스타벅스(얼마만에 스벅인가ㅠ)에서 하루 일정과 동선을 짠 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대사관으로 향했다. 분명 당일 발급이 가능하고 무료라는 걸 확인하고 갔는데, 대사관 직원은 "당일 발급받으려면 30달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비자 찾으려 다음주 화요일에 오라"고.


당황하지 않았다. 예측 못할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남미. 대사관이라고 예외일리 없기에 이 도시에서 주어진 24시간 안에 모든 걸 해결하고자 후기들을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30불 요구는 기출문제에 있었다. 후기에서 본대로 바로 "내 친구들이 이미 다 당일에 무료로 발급받았다고 들었다"며 강하게 맞받아쳤다. 그러자 잠시 확인해보겠다며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척 하더니 "North 아니고 South구나. 그럼 공짜야"라고. 미리 알아본 덕에 어쨌든 원하는 바대로 오후에 비자를 받기로 하고 홀가분하게 대사관을 나설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울며겨자 먹기로 30달러를 냈겠지. 그랬다면 그 돈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남북한 얘기가 진짜였을 수도 있겠지만.



첫 번째 미션을 끝내고 두번째 미션인 한식 도장깨기에 나섰다. 산티아고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해서인지 유명한 한국 식당들이 여럿 있다. 메뉴를 고민하다 서울식당에서 순댓국을 먹고 최대한 소화 시킨 뒤 한인촌에서 김밥까지. 한동안 한식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마음까지 두둑해지게 챙겨 먹었다.



칠레의 9.11

여행을 하다보면 새삼 우리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다. 산티아고의 '기억과 인권 박물관'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그간 칠레를 생각하면 와인을 먼저 생각났는데 이곳에 다녀온 뒤로 '9.11'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1970년, 칠레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취임 후 구리광산 국유화, 토지개혁, 어린이 우유 무상 지급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자본가들과 우익 군부 그리고 사회주의 확대를 꺼리는 미국의 반감을 샀다. 미국은 칠레의 주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재고를 있는대로 풀었고, 글로벌 식품회사에 압력을 넣어 분유 수출까지 막았다. 취임 첫해 반짝 성장한 칠레 경제는 이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물가 상승률도 70년 34.9%에서 74년 508.1%로 미친듯이 뛰어올랐다.


군은 '경제 파탄'을 이유로 내걸고 쿠데타에 나섰다. 아옌데가 눈엣가시였던 미국이 쿠데타를 지원했다고 알려져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군은 거침이 없었다. 대통령 궁으로 진격했고,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버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3년 9월 11일에 일어난 일이다 .


쿠데타로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은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군과 경찰이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금캠프로 끌려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칠레 지도에 구금캠프 위치가 빨간등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한 눈에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없는 빨간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끌려갔던 사람들 중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정권은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는데 그 시신이 떠올라 발견되기도 했다고. 칠레가 독재에 대항한 73년에서 90년까지의 기록을 보는 것만으로 괴로웠지만, 곳곳에서 한국에 역사가 겹쳐져 더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참고자료

- 1973년 9.11···미국,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다(서울신문, 201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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