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파라이소, 칠레
시작부터 헤매더라니
푸콘에서 헤어졌던 두 사람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발파라이소로 가는 버스 터미널. 야간버스로 온 그들을 만나기 위해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근처에 버스 터미널이 두 곳이라 헷갈릴 수 있겠다 싶어 만나기 전에 약속 장소를 여러 번 확인했는데 결국 헤매고야 말았다. 짐은 양손 가득이지 갑자기 인터넷은 안 돼 연락할 방법도 없지... 미안한 마음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헤맨 적이 거의 없는데 왜 하필 지금일까. 차라리 혼자라면 짜증은 좀 나지만 느긋한 마음일 텐데. 발도 머리도 쉼 없이 움직였다. 두 터미널 곳곳을 왔다갔다 한 끝에 결국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순탄치 않았던 발파라이소 여행의 전조가 이때부터 보였다.
횟감 찾아 삼만리
바릴로체와 산마르틴, 푸콘을 함께하며 먹방을 시전했던 우리. 누가 얘길 꺼냈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항구도시인 발파라이소에서 해물탕과 회덮밥을 해먹자고 중지가 모였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바로 수산시장 찾기에 돌입했다. 도시 구경을 하며 수산시장이 있다는 위치까지 왔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검색해보니 현재 공사중이란 블로거의 글이 나왔다. 대형마트엔 뭐라도 있겠지 싶어 찾아갔지만 수산물 코너가 없고, 직원에게 "씨푸드를 찾는다"고 하니 통조림 코너로 우리를 안내했다.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인포메이션 직원에게 해산물 살 만한 곳을 물으니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한 곳을 안내해줬다.
기왕 나선 길이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직원이 말한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 써있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가 써있는 버스는 오질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버스를 붙들고 ***란 지명을 대자 기사 대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타. 15분쯤 걸릴거야"라고 답해줬다.
(번외. 버스비를 내야 하는데, 남미는 유럽처럼 통화가 통합되어 있지 않다 보니 나라 마다 동전을 구분하는 것도 여행자에겐 일이다. 특히나 버스처럼 뒷사람 눈치를 보며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할 땐 더더욱. 버스비를 계산하기 위해 출입구 쪽에서 이 고르기 하듯 나라별 동전과 화폐 단위를 구분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타"라고 말씀해주셨던 할머니가 "아르헨티나 동전 내도 돼. 괜찮아"라며 쿨하게 그냥 내라고 말씀하셨다. 그 와중에 나는 또 동전을 맞춰서 열심히 셌는데, 3인의 버스비를 손에 한가득 내미니 버스운전 기사는 전화통하는 하면서 쳐다도 안 보고 동전통에다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우리 셋은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웃어댔다. 지금 생각하니 '뭐가 그렇게까지 웃겼지?'싶은데, 그때의 나는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운 여고생 모드였던 듯 하다)
가는 길 차창 밖 바다 풍경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동전 세기와 바다 구경에 15분이 금방 지나갔다. 바다 사진을 찍느라 여념없는 우리에게 천사 할머니는 "내리라"며 손짓을 했다. 목적지보다 한정거장을 지나치긴 했지만,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를 일.
인포메이션 직원이 알려준 곳으로 왔지만 수산물 시장은 또 없었다. 2층 레스토랑에서 자기네 생선을 팔겠다고 하는데 그걸 위해 온 건 아니었다. 결국 빈 손으로 바다 구경을 하면서 시내까지 걸어내려왔다. 목적 달성은 못했어도 이 상황이 웃겨 웃음이 계속 나고 또 바다는 너무 아름다웠으니 그거면 됐다고 하면서.
몰라도 퍼레이드는 신나
버스로 15분쯤 간 길을 걸어내려오니 다리가 뻐근했다. 카페나 가자고 마음 먹었는데 갑자기 퍼레이드 행렬이 이어졌다. 다리 아픈 것도 잊고 홀린 듯 계속 퍼레이드를 따라 움직였다. 왜 하는지 궁금해 알아내고 싶었지만 결국 답은 찾지 못한채.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쫓아가길 포기했다. 아쉬운 마음에 마트에서 냉동 새우를 사다가 넣고 열라면, 신라면, 오징어짬뽕을 섞어 끓였다. 그 와중에 새우는 또 초장에 찍어먹었다. (초장이 있어서 우리는 회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걸까?)
Human being이 그럴 순 없지
다음날 아침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을 수도, 그렇다고 눈 뜬 김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체크아웃 전에 비가 그치기만을 바랄 뿐. 하지만 바람과 달리 비가 계속 오기에 우산 하나를 빌려 길을 나섰다. 우버를 부르려니 비싸서 내려가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자고 계획을 세웟는데, 두개 모두 문일 닫혀있었다. 폭우에 거리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쫄딱 젖은채로 겨우 지나가는 택시 한대를 세워 네루다의 집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있어 이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멋있다고 들었다. 비오는 날이라 기다를 버리고 가긴 했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잔뜩 흐린 하늘 뿐. 축축한 옷을 입고 에어컨 빵빵한 실내를 돌아다니자니 절로 오한이 밀려드는 듯 했다. 기대했던 네루다의 집은 그렇게 보는 둥 마는 둥 스치듯 안녕을 고하고 나왔다.
춥고 배고픈 상태라 '맛'은 고사하고 가격이 적당하면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비가 와서인지 휴일이어서 인지, 관광지 근처인데도 문 연 카페나 식당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숙소 근처로 내려가려 해도 지나다니는 택시도 없었다.
방황하던 그때, 한 사람이 "여기 레스토랑 가"라고 손짓을 했다. 간판도 안 보이는데 가라고 하길래 '이상한 사람이다' 경계를 하고 손을 내저었다. 근데 한창 둘러봐도 주위에 갈 만한 곳이 없어 아까 그곳으로 가 열린 문으로 슬쩍 들여다보니 웬걸? 근사한 2층짜리 큰 레스토랑이었다! 딱 봐도 비싸보인다 싶었는데 메뉴판을 보니 역시나 메인코스 하나에 1만 페소가 넘었다. 비싸다고 돌아서는데 또 갑자기 '보스'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얼마 낼 수 있는데? 거기에 맞춰줄게"라며 우리에게 흥정을 해왔다. 처음 겪는 일이기도 하고 이런 레스토랑에서도 흥정이 되나? 사기 아닌가? 온갖 생각에 머뭇거리자 그쪽에서 먼저 "5000페소에 메인 요리, 음료, 디저트까지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우리가 마음을 정하자 자리로 안내하며 "human being으로서 너희를 그냥 보낼 수 없지.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다른 곳을 다 닫았을거야"라고. (비맞고 방황하는 모습이 꽤나 안쓰러워보였나보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어떤 음식이 나올지 기다렸다. 먼저 음료가 나왔는데 무료 생과일 주스였다. 그리고는 메인으로 제대로된 생선요리가 나왔다. 후에 찾아본 여행앱 리뷰에서 평점이 썩 좋진 않은 식당이었지만 그날의 내겐 별점 5개도 부족할 만큼 만족한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