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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Dec 01. 2022

나보다 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

우리 엄마는 "여자는 하얗고 고와야 해"라는 이유로 어린 나를 흰 우유와 인삼을 달여 식힌 물로만 목욕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단호하게 "여자애가... 다쳐서 안 돼"라고 거절했다.


결국 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도복을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반면에 여린 성향인 동생은 성별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가고 싶지도 않던 태권도 학원을 울면서 다녔고. 내 나이대에는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여성은 부딪힘과 깨짐을 피하라고, 남성은 나아가 타격하라고 배우는 경험.



수비 할래? 공격 할래?


피하는 성향이 몸에 익은 탓인지 "수비가 편하세요, 공격이 나으세요?"라는 질문 앞에서 "제가 수비 서면 안 될까요?"라고 반응하기 일쑤였다. 아마도 '공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칠 공(攻)자에 부딪칠 격(擊) 자로 구성된 '공격(攻擊)'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나아가 적을 침"이다. 나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심지어 타격까지 주어야 한다.


'수비(守備)'는 지킬 수(守) 자에 갖출 비(備) 자를 쓴다. 사전적 정의는 "외부의 침략이나 공격을 막아 지킴"이다. 되도록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수세적인 움직임이다. 아무래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이에게는 무언가를 이루어내기보다는 잃지 않는 편이 수월해 보인다.


호기로운 반대편 수비를 뚫고 멋지게 슛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다. 공격이 골을 못 넣으면 무슨 소용인가? 0점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상대를 이길 수 없는데. 심지어 손흥민도 2018년 월드컵 조별예선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졌을 때 "골 못 넣으면 공격수 책임. 국민들께 죄송하다"라며 사과하던데.


시합 시작 전 서로를 향해 인사 서로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예의를 갖추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건넨다.ⓒ 오정훈



문제는 팀 코치님의 판단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코치님과 독대를 한 적이 있다. 이제부터 나를 공격에 주로 세우겠다는 그에게 물었다. 


"한 골도 못 넣는데 공격에 서는 게 의미 있나요?"


"왜 골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대를 흔들어서 내 편이 넣게끔 돕는 것도 공격수의 역할이에요. 게다가 풋살은 키퍼 빼면 네 명이고, 수비도 공격하고 공격도 수비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축구에서도 수비가 공격하고 공격이 수비하고 그래요."


그는 준비해왔다는 듯이 내 장단점을 줄줄 읊었다. 팀에서 체력이 제일 좋고, 전방에서 쉼 없이 움직이며 상대 수비들을 흔들 줄 안다고, 본인이 상대편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공격수 상대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냐고. 그러니 너는 공격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요즘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앞으로 많이 쓸 겁니다. 이번 대회에 많이 뛸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를 '쓴다'고? 그런 말 처음 들어봐. 어떻게 쓰는 걸까? 쓴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걱정과 기대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권위자인 '코치'가 나를 쓴다고 하니 정말 쓸 만한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친구들에게 방해꾼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뛰었다면 이제는 '코치님 기대에 실망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해졌다. 대회까지 한 달 남짓. 그 안에 어떻게든 나아지고 싶었다.


'벌크업하고 싶다'는 바람도 이 시기에 자라났다. 결심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단단한 몸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주어진 역할에 걸맞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내 몫을 준비해나갔다.



익룡 같은 울음소리 "이런 날이 오다니"


대회 날이 밝았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결승까지 올라간다면 15분씩 총 7경기를 뛰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우리 팀은 다른 팀들보다 인원이 많은 편이었지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필드도 지금껏 친선 경기 치렀던 다른 장소들보다 더 넓어 보였다.


대결은 코트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차마 앉아서 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를 바라보며 응원의 소리를 지르는 친구들의 뒷모습.ⓒ 오정훈



일전에 친선 경기에서 코치님은 나를 공격 10분, 수비 5분 세웠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15분 내내 공격, 공격만 시켰다. 아무리 상대 흔드는 역할이라 해도 골을 넣어야 이길 텐데... 별로 이길 생각이 없으신가? 그때 골키퍼를 담당하던 바우가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언니, 내가 밀어줄 테니까 무조건 안으로 뛰어요."


에이스의 말 믿어보기로 했다. 공이 눈앞에 보여도 달리고 내게 없어도 달리고, 그냥 빈 공간을 향해 마구 뛰었다. 그랬더니 정말 공이 딱 내 앞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키퍼인 바우 위치에서 시작된 공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필드를 갈랐고, 최전방에 있던 나에게까지 닿았다.


발아래에 놓인 공을 보자마자 골대를 향해 질주했다. 키퍼의 두세 걸음 앞에서 반 박자 빠르게 때린 공은 상대 골키퍼의 왼 다리를 스치며 그대로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골이다! 데뷔골이다!(무려 6개월 만에!)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었고, 함께 뛰던 친구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함께 얼싸안고 강강수월래를 췄다. 밖에 있던 친구들의 함성도 들렸다.


"으아아아아악! 이지은! 이지은!"


우리 팀은 이날 7경기 동안 총 여덟 골을 기록했다. 나중에 경기 영상을 봤는데, 내 골 장면 때 친구들의 함성 데시벨이 가장 컸다. 그건 사람이 아닌 익룡의 울부짖음 같았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가온 바우는 "언니, 거 봐요. 내가 밀어준다고 했죠!"라며 나보다 더 신나 했다. 경기 내내 구분 없이 뛰어다닌 탓에 기운을 소진하고 멍해져버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코치님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와... 이런 날이 오다니."


덕분에 알았다. 코치님과 친구들도 나만큼이나 나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부족한 실력으로 늦게 합류한 팀에 적응하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나만 보였는데, 이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었구나. 살면서 이토록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이를 몇이나 만날까. 익룡의 울음 같은 응원을 받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오늘도 느꼈다. 나, 축구하길 정말 잘했구나.


시합이 끝나고  하늘이 파랗고 쨍할 때 시작한 대회는 어둠이 내려앉고 달이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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