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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Mar 15. 2023

인생에도 백패스가 필요해

쉬었다 가도 괜찮다는 말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해낼 때까지 노력한다,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살면서 이 삼박자 패턴이 실패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축구를 접하며 '축구 신동이 되겠어'라 결심했고, 이후로는 매일같이 훈련에 매진했으며, 정말 원하던 바가 코앞까지 온 것만 같았다. 부상이라는 복병이 다가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렇게 무리하다가 생긴, 눈에 띄는 부상만 한두 달 만에 서너 개. 골반 석회성건염, 종아리 근육 손상, 종아리 혈관 파열 등 전부 공이나 누군가에게 부딪혀 얻은 게 아니라, 몸을 많이 써서, 너무 놀린 탓에 생긴 부상들이다. 당연하지, 일주일에 공을 여덟 번씩 찼으니까. 최근에는 일주일에 서너 번까지 줄였지만 이마저도 남들이 볼 때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횟수일 테다.



"아픈데 축구를 왜 해요?"


▲ 부상 후 후퇴 친선 경기를 뛰다가 종아리 통증을 느껴 경기를 포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근육통인 줄 알고 스트레칭하는 중.


 나는 왜 나를 과신할까. 어째서 자꾸만 스스로를 혹사시킬까. 무쇠로 만든 몸도 아니면서. 처음에는 '팀에서 제일 나이도 많고 뒤늦게 합류한 데다가 축구 초보자인 내가 친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연습해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했고, 나중에는 그냥 축구가 재미있어서 계속했다. 



한번은 왼쪽 종아리가 퉁퉁 붓더니 통증이 심해져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병원에서는 혈관이 터졌다고, 혈관 밖으로 새어 나온 피가 피부 아래에 고여 종아리에 통증을 유발한 것이라고 했다. 부상 때문에 어기적거리던 내게 친구 먼지는 폭풍 잔소리를 해댔다.



"도대체 아픈데 축구를 왜 해요?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는 거예요! 안 되겠어, 당장 약속해요. 다 낫기 전에 축구하면 밥도 사고 술도 사고 노래방까지 쏘겠다고 공약 걸어요, 얼른!"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의 채근 앞에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약속한다고 해서 지킬 자신도 없고, 축구했으면서 안 했다고 거짓말할 배짱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회사 동료는 월요일마다 내 몸 상태를 살핀다. 괜찮아 보이는 날에는 "안 다치고 출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면 "진짜 축구 못 하시게 어딘가에 묶어놔야겠네요"라며 안타까워한다. 축구 친구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다가 일상 친구들의 걱정을 사고 회사 동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상황인 것이다. 미안해요, 여러분. 나도 내가 주체가 안 됩니다.


 
부상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혼자 하는 운동에서 부상은 초조함(이러다가 그간 배웠던 거 다 까먹는 거 아냐?)과 안도(당분간 운동 안 해도 되는구나!)를 가져다주는 데 반해 팀 운동은 죄책감(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어쩌지?)까지 불러일으킨다.

▲ 풋살공과 콘 볼 컨트롤과 드리블 연습을 하기 위해 근처 풋살장에 혼자 나왔다.



거기에 회사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는 상황까지 더해지다 보니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이야' 싶어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중이다. 잘하고 싶어 했던 노력들이 죄책감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칼럼을 즐겨 읽는다는 한 분이 걱정 섞인 말투로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앞으로 축구 조금만 줄이시면 어때요? 저는 일주일에 수요일 하루밖에 축구를 안 하거든요. 그래서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요. 지은씨도 그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대신에 연재 글을 더 열심히 써주시는 거죠. 저처럼, 지은씨에게는 뜬금없는 사람들이 칼럼 연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좋아한다고 해서 종일 그것만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소중함을 잃을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나처럼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좋아하던 것을 잠시, 어쩌면 영영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쉬면 낫는 병이지만(쉬지 않는다는 작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 불가역적인 부상을 입거나 만성 질환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축구왕은커녕 축구 자체를 못 하게 되면?



"안 되면 백패스!" 



목표를 세우면 직진만 하는 내가 축구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상당하고 아파서, 타의로 축구 인생에서 퇴장당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은 길고 예순까지 축구하기로 했으니까, 이제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기로 했다.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 풋살장 전경 혼자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졌고 공원에는 나 혼자 남았다.



축구에는 '백패스'라는 룰이 있다. 우리 편 공격인데 상대방 수비수로 인해 공격 길이 막히면 바로 뒤를 바라보고 다른 수비나 골키퍼에게 공을 돌린다. 처음에 백패스 규정을 설명할 때 코치님은 이 말을 강조했다.



"안 되면 백패스! 쉽게, 쉽게 해요. 뒤로 백 번 돌려도 돼요. 뺏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무리해서 공을 전진시키느니 차라리 안전한 뒤쪽에서 다음을 노리라는 뜻이다. 지금 내 축구 인생에도 백패스가 필요한 시점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나는 최근에 가입했던 혼성 풋살팀을 탈퇴했다. 전진만 하던 내게 제동을 걸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뒤로 백 번 천 번 물러난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패스 길이 보일 테니까. 그때 내 플레이를 해내야지. 단기간에 바짝 열심히 해 축구 신동에 안착했다가 바로 사그라지기보다는 근근이 20년 공차면서 그저 그런 선수로 남을 것이다. 더는 부상당하고 싶지 않아. 밥값 내기에서 지고 싶지 않아.



▲ 스프린트 연습 스프린트 연습 중인 혼성 풋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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