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도 끝까지!" 대충은 없다
볼 돌리기 수업(공격자들이 원을 그리고 서서 안쪽 수비수를 피해 공을 돌리는 일종의 술래잡기 게임)이 화근이었다. 공격자들의 패스가 스물다섯 번 이상 이어지면 수비수가 음료를 사는 내기였는데, 두 판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공격자일 때 내 패스는 수시로 끊겼고, 수비수일 때는 볼을 빼앗지 못하고 쫓아만 다녔다. 너무 오래 수비를 서다 보니 한껏 지쳐서 나중에는 '안 해. 그냥 내기에 지고 말지'라고 생각해버렸다. 패배의 값은 1만2000원.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코치님이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지지 마요."
지고 싶어서 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껏 억울했지만 뭐, 별 수 있나. 실력이 모자란 내가 문제지.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내기는 이미 끝났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내 실력으로 2년차 축구 친구들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 내게 운동 머리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좌절이 나를 끝없는 자기혐오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이날의 감각은 마음속 어딘가에 상흔을 남겼다. 이후로는 볼 돌리기 게임만 하면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다. 공 뺏겨 수비로 들어섰을 때 공격자들의 패스가 열 번이 넘어가면 그 순간부터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몸은 한껏 무거워지고 발걸음은 점차 느려진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패스를 막을 수 있는 거지? 도통 모르겠다.
당시에 나는 얼른 내기 값을 지불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갇힌 원 안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열 번, 스무 번 친구들의 패스가 쌓이는 순간부터는 '조금만 더 견디면 나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치른 패배의 값은 고작 1만 2000원으로 끝나지 않았다. 포기한 순간은 나를 며칠 동안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한껏 쪼그라진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제 겨우 축구에 자신감이 붙었나 싶었는데,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것이다.
이런 나를 누군가는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다. 열패감에 고개 한 번 못 든 채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황소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내 모습들에 하나하나 정성 들여 피드백을 보내준 것이다. 지난번보다 전진 드리블도 많이 늘었고, 수비도 단단해졌다고. 그 격려 앞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나도 오늘 뭔가 한 게 있었구나..."
"그러니까 언니, 어깨 펴! 모든 건 그냥 훈련일 뿐이야. 못하는 거 곱씹지 마! 더럽게 안 되는 거 많지만, 언젠간 되겠지. 열심히 하고 하다가 끝까지 안 되는 건 버리고, 되는 것만 남기면 나중에는 축구 꽤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못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고, 잘하는 것을 더 잘하면 어느 순간 못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물론 못하는 게 너무나도 많다는 사소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하다).
"못해도 끝까지." 코치님에게 늘 듣는 말이다. 내 발이 조금만 느려지려고 해도 그분은 이 말을 목놓아 외친다. 한번은 쉬는 시간에 혼자 공 만지고 있는 내게 코치님이 슬쩍 다가오더니 말을 붙였다.
"지금 배우는 것들 다 잘 모르겠고 너무 힘들죠?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즐기는 축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대회 나갔다가 순식간에 지고 나니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은 버겁겠지만 일단 한번에 다 익히려 하지 말고 그냥 눈에 많이 담아두세요."
나중에 들었는데, 코치님은 볼 돌리기 이후 한껏 의기소침해진 나를 눈치챘고, 이후 수업부터는 이 훈련이 잠시 중단되었다. 내 대충대충이 동료의 걱정을 사고 교사의 수업 방식까지 바꿔버린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로펌 인턴 체험을 담은 예능 <신입사원 탄생기 - 굿피플>(2019)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로스쿨 재학생 여덟 명이 한 로펌 회사에서 인턴 기간을 거쳐 최종 두 명을 선발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결국 누군가는 탈락할 줄 알면서도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같이 아꼈다. 회를 거듭할수록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장 마음이 가던 인턴은 이상호씨였다. 매사에 꼼꼼한 이시훈 인턴이 순간적인 기지가 장점인 이상호 인턴과 한 팀이 된 적이 있다. 어차피 멘토 변호사들이 검토해주는데 자료만 찾으면 되지 굳이 우리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상호씨에게 이시훈씨는 대답한다.
"그건 맞는데, 어쨌든 대충 하지 마요, 상호씨. 납득할 수 있는 걸 만들어놔야 하잖아. '될 것 같은데'라고 하면 안 돼요."
대충 하지 말라. 스스로를 납득시킬 때까지 노력하라. 그 충고를 주워듣는 이상호씨의 표정은 한 대 얻어맞은 것마냥 얼얼해 보였다.
언젠가 친선경기에서 대패했을 때 임수는 이런 말을 했다.
"어쩌겠어, 지금 이게 난데.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나를 버려?"
아마 임수는 그날 최선을 다해 뛰었을 테고, 그 사실을 자신이 알기에 이런 단단한 말을 내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냥 남들 따라 뛰기만 했던 나는 그의 말에 이상호씨의 그 얼얼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볼 돌리기 훈련 때 스스로 납득할 만큼 열심히 뛰었다면 내 마음은 조금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 정도 했는데도 안 되는 걸 어쩌겠어'라며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얻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남이 사주는 음료를 당당하게 얻어먹을 그날을 위해 오늘도 공을 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