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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r 07. 2024

다정해보기로 해요

물 한 병의 가치

  한식이 급한 건 아빠였다. 인도에 1년 정도 살았기 때문에 인도 음식에 완벽하게 적응한 줄 알았다. 매번 퇴근하고 집에 가서 듣도 보도 못한 인도 음식을 먹기도 하고 그 악명 높다던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혼자 매일 한식을 만들어 먹어 왔었고, 우리 여행 일정 전 이미 출장으로 인해 며칠간 한식을 먹지 못했던 던 것이었다. 비행기에서까지 한식을 먹어 왔던 우리와는 달랐다. 향신료와 버터로 범벅된 인도 음식들을 일주일 넘게 먹던 아빠는 느끼해 죽겠단 소릴 했고, 어설픈 한식을 찾아 먹다가 퓨전 요리를 판다는 음식점에 갔다.


  중국음식인지 인도 음식인지 모를 것들을 많이 팔고 있는 식당이었다. 딤섬과 볶음국수, 매운 닭요리, 파스타 등을 야무지게 시킨 우리는 간만에 밀려오는 깔끔한 매운맛과 맥주에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난 우리는 식당을 나서 차를 타면서 웃었다. 한국인들 진짜 많이 먹는다고 깜짝 놀라겠다 그치? 정말 그랬다. 어딜 가도 한국인들은 꽤 많이 먹는 편이어서 다른 테이블은 심플한 차림인데 반해 우리만 진수성찬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잦았다.


식당이 아주 마음에 들어 간판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그 순간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종업원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어색하게 웃는 어린 종업원은 무어라 말하면서 나에게 물 한 병을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받아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 종업원은 다시금 덧붙였다.


  "잇츠 유얼스!"


  외국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는 물인심이다. 우리나라는 워낙 물 인심이 좋은 터라 그 어느 식당에서도 물에 돈을 청구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나는 외국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유로 물'에 입이 떡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누가 외국을 나간다 하면 절대절대 식당에서 그냥 테이블에 올려둔 음식이나 물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당부한 적도 있다.


  그날 그 식당에서도 처음부터 테이블에 있던 큰 물병을 우리는 본 체도 하지 않고 맥주만 세 잔을 시켰더랬다. 한참 밥을 다 먹으면서도 손을 대지 않았고, 밥을 다 먹고서도 그냥 두고 나왔다. 근데 그 물이 돈을 받는 물이 아니라 그냥 주는 물이었던 것이다. 1L나 되는 큰 물병이었어서 더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세상에 이리 물 인심이 좋았다니. 내가 그제야 알아듣고 웃자 그 사람은 헤헤, 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게 웃고선 다시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생각할수록 귀여웠다. 그냥 주는 물이라고 해도 겨우 물 한 병인데, 손님이 마시고 싶지 않아서 마시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엄마와 나는 같이 웃었다. 이게 뭐라고 귀하게 끌어안고 뛰어나왔을까? 그냥 물 한 병인데… 나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마침 물을 사려했는데 정말 잘 됐다며 좋아했다. 숙소에 와서도 어찌나 갈증 나던지 혼자 물 세 컵을 연거푸 마시기도 했다. 평소엔 겨우 물 한 병이라고 여겼었지만, 더운 여름의 나라에서 어쩌다 받게 된 물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다정은 공짜라는 말. 처음 들은 이후 내내 신념처럼 잊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그럼에도 타인에게 다정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선뜻 손을 내미는 일에는 약간의 뻔뻔함도 필요한 일이니까. 나는 누군가가 두고 간 물 한 병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일까? 나에겐 별 것 아닌 일이 다른 사람에게 큰 소중함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겨우 물 한 병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거저 배운 다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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