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진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한 달 어스에서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동료인 나미님이 읽고 있는 책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우지현의 강렬한 빨간 표지의 그림 에세이 <나를 위로하는 그림>이다. 지은이 우지현을 소개하는 글에서 그녀는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때면 그림에서 위안을 얻는 다고 한다. 그녀에게 그림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자 삶에 희망을 주는 존재이기도 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고 있기에 이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책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그중에 나에게 와닿은 글귀가 있어 소개해보려고 한다.
사람 만다 상처받는 지점이 다양하기에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는 일은 꽤 주의가 필요한 일임에도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쉽고 판단한다. 섬세하게 반응하는 법을 몰라 날카로운 말로 여린 가슴을 꼬집고, 한기 섞인 말투로 민감하게 대응한다. 낭비하며 던진 말은 비릿한 충고가 되고, 곤두선 애착은 너와 나의 거리를 멀게 한다. 품은 말 다 삼키고 겨우 뱉은 황량한 한마디로 끝끝내 믿음을 붕괴시킨다.
쇼펜하우어도 말하지 않았던가.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으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가 결국 우리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인간은 상처로 연결되어 있고 세상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상처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에드먼드 타벨이 그린 <푸른 베일>, 1899의 그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그림에는 아무도 없다. 여인을 휘감고 있는 베일만 있을 뿐이다. 끝내 벗어날 수 없던 기억을 숨기기 위해 몸에 익은 습관이 겨우 상처를 덮는 일이다. 베일 쓴 여인을 통해 얼굴 이면에 감춰진 내면의 상처를 담담하게 표현한 타벨의 이 그림은 상처받는 이들에게 바치는 우아한 천사 같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내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고 그림은 그것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받은 여인으로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신비로운 여인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에 잠긴 여인으로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꿈을 꾸는 여인처럼 보일 수 있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고 한다. 나는 이푸른 베일을 쓴 여인을 보면서 작가가 표현한 상처를 많이 볼 수없었다. 화가가 그린 상처가 나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보랏빛 나는 푸른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여인의 냉담한 얼굴 표정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허전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다르더라도 그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고 한다. 흐려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나 자신의 상처 또는 감정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내가 받은 상처, 그리고 미처 생각지 못한 타인에게 준 상처, 그 모든 것에 온전한 관심을 가지고 가슴에 새기며 치유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상처에 상처를 더하고 난 뒤 딱지라는 훈장을 얻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서로의 상처를 배려하고 보듬어주는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존재하고 있을 '베일 쓴 여인'에게 당신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겠노라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