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성 암 환자를 보고 나는 말기 암 환자라고 표현했다. 종양내과 교수님과 하는 첫 회진이었다. 환자는 소화기내과에서 위암 4기를 진단받고 이제 막 항암치료를 하러 의뢰된 환자였다. 교수님께서는 말기 환자가 아니라고 했다. 이 환자에게는 시도해볼 수 있는 치료 방법이 꽤 많다고 했다. 네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라고 했다.
학창 시절 대장항문외과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을 해주셨다. 암 생존율의 획기적 증가는 조기 진단과 조기 수술로서 가능하다. 항암치료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고 있지만, 암은 결코 정복되지 못했다. 암 진행을 막을 수 있는 기간, 결과적으로 생존 기간을 늘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암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암 환자를 살리는 방법은 더욱 빠른 발견과 정확한 수술로서만 가능하다.
일 년 전, 한 환자 앞에서 당신은 수일 내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우리에게 가능한 치료법이 없다. 곧 의식이 없이 중환자실로 가야만 할 것이고, 인공호흡기와 혈액 투석은 단지 연명에 불과할 방법이며 진행된 암에 대한 처치는 불가하다. 연명치료를 하시겠는가. 환자는 의미 없는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했고 본인 손으로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를 작성했다. 일 년만에 나는 췌담도 내과로 돌아왔고,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문헌의 공고한 자료에 의하면 그의 기대 여명은 2주 정도였다. 말기 암의 다발성 전이에 의한 장기부전이 시작한 상태였으니까. 그가 일 년의 세월을 견디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가르쳐주는 교수님은 고대의 전설로서 전해지는 명의처럼 느껴졌다. 그의 생존을 접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기대여명이나 생존 기간 같은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환자는 어떠한가. 진단과 동시에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분도 있다.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죽을 때까지 항암치료를 견디라는 이야기가 아니냐. 몇 개월 살다 죽을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삶의 의미라는 것은 의사가 구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정말 궁금했다. 어차피 패배할 것이 자명한 싸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내가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 앞에 무슨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삶의 끝에서 남은 시간의 희망을 본다. 누군가는 끝에 그어진 선에 집중해서 감옥과 같은 절망을 느낀다. 어찌 보면 삶은 무한한 삶의 갈증에서 비롯되는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암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은 그 환상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신이 되는 셈이다. 의사의 입에서 내어지는 냉철한 말 앞에서 누군가는 남은 시간의 빛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남은 시간의 어둠에 좌절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내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로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먼 일로 느껴지고, 둘째로는 너무나 슬프기 때문이다. 진정한 죽음, 완전한 무에 대해 생각하면 슬픔의 바다에 잠식되어 거의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 된다. 올해 나는 스물 일곱, 삼 년만 있으면 서른 살이 될 테다. 하지만 나는 서른 살 너머의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바 없다.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올해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으니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 너무 어렵다. 그것을 이해하는 길을 찾아야만 할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