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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화영 Sep 02. 2023

37. 아직은 용기가 안 나서

내 잘못으로 멀어진 친구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우리는 고2 겨울부터 각기 다른 친구들과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 서로를 찾지 않았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우리는 다시 연락을 주고받았다. 6개월 간 가끔 만났고, 카톡도 주고받았다. 친구는 학교 기숙사로 편지를 보내주었고 나는 답장을 썼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더는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둘 다 대학교 생활에 정신이 없어 연락은 더 뜸해졌다.


여름방학이 찾아왔고 나는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지금 어디냐고 물으니 본가에 와 있다고 하더라. 나 역시 본가에 있었기 때문에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조만간 만나자고 했다. 친구는 어렵겠다며 거절했다.


나는 친구에게 왜 본가에 온 걸 미리 얘길 안 했냐고 서운한 티를 내며 물었다. 친구는 그전까지 묻는 말에 단답으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이번에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집에 왔다고 무조건 널 만나야 되는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친구는 반드시 나를 만나야 할 의무가 없었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말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처럼 들렸다. 날 주기적으로 만날 만큼 나와 함께 있는 게 즐겁지 않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떻게 통화를 끝마쳤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친구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 냉랭하게 받아쳤던 것 같다. 마음의 상처가 분노로 변질되던 순간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는 친구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며 씩씩댔다.


1년이 흘렀고 나는 친구의 친구에게 소식을 들었다.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고 했다. 나에겐 따로 온 연락이 없었으므로 친구의 인간관계망에서 제외되었음을 간접적인 경로로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연락하고 싶어도 먼저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관계를 끊었으니 내가 연락한다면 불편해하고 싫어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나는 친구의 생일을 자주 잊었고, 특유의 행동이나 말버릇도 꽤 많이 잊어버렸다. 둘이 쌓은 추억도 어렴풋하다. 이제는 친구가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다만 가끔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대학교 졸업하던 날, 첫 직장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날, 결혼식을 앞둔 날, 소소한 일상에 젖어 행복한 나날 중 어떤 날. 가끔 미안했고 가끔 보고 싶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아직은 용기가 안 나서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이 끄적임으로 대신한다.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이 있고, 만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는 후자의 경우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다. 친구에 대한 기억을 잠시 꺼내다, 다시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다. 아직은 용기가 안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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