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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갬성꿈나무 Sep 06. 2023

38. K 이야기(1)

2015년 봄, 야외 녹화가 있던 날 K를 처음 만났다. 


그날은 바람이 온연한 성품을 지닌 듯 따뜻했다. 날이 안 좋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큐시트(방송이나 공연 따위의 연출 과정을 상세하게 적어 놓은 일정표를 말한다)를 확인하고 고이 접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큐시트를 펼쳐 챙겨야 할 것들을 메모했다. 


현장진행을 맡은 나는 분주했다. 평소에는 항상 같은 장소에서 녹화했다. 그리고 실내였다. 그날은 무대가 야외에 세팅된 데다 규모도 여느 날보다 2~3배는 컸다. 500명 넘게 관객이 모일 터였다. 


"5분 후에 카메라 리허설 진행하겠습니다!"


쪼렙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감추려고 목소리에 힘을 더 주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을 터였다.


현장진행을 돕는 진행팀이 있었다. 총 2명이었고 나와 한 팀처럼 움직였다. 소품을 함께 챙기고, 관객 인솔을 도왔다. 스태프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거나 카메라 감독의 어시스턴트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외주 업체 소속으로 녹화 날마다 조력자 역할을 해 주어 늘 든든했다.


그렇게 고정적으로 와 주던 2명 중 1명이 일정이 있어 빠졌다. 그리고 대신 온 사람이 바로 K였다.


K는 낯가림하는 아이 같았다. 나보다 한 살이 많다고 했으니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진행팀 사람들은 대체로 20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리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뜻밖에 연상의 인물이 나타나자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도 심적 의지가 됐다.


끼니 때가 되어 진행팀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때도 K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거나 조율할 일이 생기면 보통 나에게 말을 거는데, K는 말을 걸긴커녕 내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긴밀하게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 이래서야...'


나는 답답했다. 소통을 해야 일하기가 편할 텐데, 그는 그동안 봐 왔던 사람 중 가장 말수가 적었다. 


그렇다고 녹화 진행에 지장을 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묵묵히 본인이 할 일을 알아서 다 해 놓았다. 일을 시켜주길 기다리지 않았고 먼저 나서서 살뜰히 살피고 챙겼다. 다만 나와 대화하지 않을 뿐이었다.


'이런 일 잘하는 극내향인은 처음이야...' 


꼼꼼히 챙겨야 할 요소가 산더미 같았던 그날, K 덕분에 녹화는 수월하게 끝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내 말에 고개만 꾸벅 숙이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결심했다. 이 사람 앞으로 고정적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해야지. 그리고, 친해져야지.


그 후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녹화일 밤이 되면 함께 회포 풀러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거나, 커피를 마시자고 하며 회식을 주도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K는 꽤 오랫동안 입을 떼지 않았고, 회식은 너네들끼리 하시라는 표정으로 쿨하게 귀가하길 반복했다. 그러나 지성 = 감천이랬다. 지극한 정성을 쏟은 끝에, 우리는 어느새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2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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