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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Mar 02. 2019

와인에 대한 단상

가까이 두는 행복

연약하고 상냥하고 수심에 가득 찬… 새침을 떨고 수줍어하는… 하지만 교활하고 우아한… 약간 경솔하다 할 정도로 너그러운 …

 

이렇게 나열된 형용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이것은 로알드 달 이 쓴 단편소설 ‘맛’에서 미식가인 리처드가 보르도 산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그것의 정확한 산지와 상표 그리고 빈티지 까지를 추리해 내는  과정에서 표현한 맛에 대한 느낌이다.   물론 캘리포니아나 호주, 뉴질랜드, 칠레 등지에서 생산되는 저렴하고 맛있고 쉬운(?) 와인들이 매년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와인의 본고장을 언급하면서는 역시 프랑스를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 와인 하면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도 빼놓을 수 없다.   음식 만화의 정석을 밟고 있는 구성과 흥미진진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상할 수 없이 깊이 있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그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거지 소굴에 살며 와인 하나만은 최고로 마셔대는 기인이 기억나는데 영화 ‘탐포포’에서 라면 국물의 거장으로 나오는 거지 할아버지와 닮아 있기도 했다.    그 만화에서도 와인의 맛을 표현하면서 가죽 혁대나 연필심 같은 비유가 나온다.   언젠가 이곳 캐나다의 캘로나 라는 곳의 유명한 와이너리에 가족과 함께 놀러 갔을 때 ‘와인 테이스팅’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맛이 어떠냐는 웨이터의 질문을 받고, 그 당시 한참 ‘신의 물방울’에 빠져있던 나는 한참을 음미하는 척하다가 “흙의 질감이 느껴진다…”라는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클래식을 듣고 철학이나 문학을 읽는 것을 교양의 기본으로 여기던 시대부터 70/80년대의 사이키델릭 록 음악과 시대의 저항정신과 함께하는 히피 문화가 트렌디한 교양이 되던 때도 있었다.   해외여행이 젊은이들의 필수 과목이 됐을 때에는 어떻게든 배낭을 메고 떠나야 했고 유럽에 한 번도 발을 드리우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촌스럽고 교양이 없는 클래스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언급되는 교양이 와인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슈베르트와 사르트르, 피츠제럴드와 지미 헨드릭스가 로마네 콩티나 샤토 마고 정도로 진화해 왔다는 얘기이다.   

 


독서와 음악 감상에 있어서 나는 완전한 잡식성이다.    고전과 현대문학, 비소설과 잡지를 나열해 놓고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다.   아침에 무언가를 쓸 때는 쇼팽의 피아노를 듣다가 출근길에는 한국의 인디 음악들을 듣고 가게에서는 하루 종일 재즈에 파묻혀 있다가 저녁에 집에 오면 노래 만들기에 빠져든다.   와인은 나의 저녁 식사와는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친구이다.   흔히들 육류에는 레드, 생선류에는 화이트 와인을 얘기 하지만 나의 경우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레드와인을 마신다.    그것도 주로 $10 이하의 아주 저렴한 와인 (주로 칠레산이 많음)을 특별히 선호하는 브랜드 없이 그저 손에 닿는 대로 골라 구입하는 편이다.   독서로 따지자면 무협지나 삼류소설을 닥치는 대로 하지만 매일매일 탐독하는 모양새 일 것이다.

나는 프랑스 와인에 대해선 교양(?) 이 부족하다.   와인의 고장을 크게 보르도와 부르고뉴로 나눈다는 정도의 기본 지식 이외에는 ‘마고’니 ‘뽀이약’ 이니 하는 지명과 그것이 어떻게 맛을 구분 짓는지 알 길이 없다.   와인을 머금고도 단맛과 신맛 그리고 떫은맛 정도를 느낄 뿐 그 속에서 상냥함이나 교활함이나 경솔함을 보는 것은 내 모든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는 어려운 고전을 읽거나 난해한 클래식을 듣는 것처럼 와인 테이스팅을 정식으로 시도해 보기도 했다.   흔히 얘기하는 5S, 즉 See 보고, Swirl 흔들고, Sniff 향을 맡고, Sip 머금고, Swallow 마시는 과정을 통해 내 미각을 일깨워 보기도 했지만 내 감각이 맛을 구분하기도 전에 이미 나의 뇌는 ‘쓸데없이 고민 말고 맛있으니 그냥 마셔라!’라는 명령을 내려버리고 만다.   

우리 가게의 와인 리스트는 주로 내가 선호하는 칠레와 호주 와인들로 채워져 있다.   포도의 품종에 따른 맛의 구분이 비교적 확실한 보편적이고 쉬운 와인들이다.   단골손님들은 우리 가게에서 즐기는 메뉴가 각자 일정하듯 함께하는 주류나 음료수도 이미 정해져 있다.    와인이나 맥주는 물론 심지어 주스나 탄산음료까지도 항상 같은 것만 주문한다.   단골들의 다양한 테이스트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많은 재고는 아니지만 모든 음료들을 종류별로 항상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특히 단골들의 예약 전화가 걸려 오면 전화를 받으면서 이미 내 눈은 냉장고 속을 향해 그들이 함께 할 음료들이 충분히 있는지 확인한다.  



와인의 특성과 역사와 브랜드 같은 넓고 깊은 교양은 제쳐두고 나에게 있어 와인은 그저 가볍게 마개를 퐁!! 따서 맛있는 식사에 곁들이는 일종의 도락이다.    와인 자체로는 뭔가 부족하고 음식 만으로는 뭔가 아쉽지만 두 아이템이 만날 때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이 메꾸어진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간혹 악기점에 들릴 때마다 흔히 말하는 명품 기타 들을 만지작거리며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아쉬워한다.   요즘은 고성능의 녹음 장비들에도 욕심이 생겨 집에서도 완벽한 사운드를 구사해 내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현실적으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독서 역시도 읽고 싶은 종이책을 서점에서 마음껏 고르고 싶지만 외국 생활은 그 모든 것을 인터넷 서점에서 해결해야 하고 책 보다 배달비가 훨씬 비싼 현실이라 간혹 한국 방문 때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e book을 다운로드해 읽고 있다.   이젠 단말기 독서가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종이책을 사서 책꽂이를 채우고 싶은 욕망은 늘 함께한다.   하지만 와인에 있어서는 다르다.   최소한 ‘샤토’라는 글자가 새겨진 프랑스 와인을 즐기고 싶다거나 좋은 질감의 크리스털 와인잔을 갖고 싶다거나 하는 욕망은 우선 없다.   호주산이나 칠레산 와인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온도를 유지함은 물론 진동을 막아준다는 와인셀러를 한대 구입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는 하지만 집 가까이 주류 마트에서 잘 보관된 와인을 그때그때 사 오면 그만이다.

 


‘당신이 그립다’라는 영어 표현은 ‘I miss you!’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바로는 이 표현은 내게 당신이 부족하다는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신이 내게 채워질 때 비로소 나 라는 완전체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채워지는 많은 것들에 그저 익숙해져 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반려견이 그렇고 소중한 친구들이 그렇고 내 손길을 기다리는 기타나 피아노가 그렇다.   한 잔의 와인을 곁들이는 식사도 내게 채워져 있는 조그마한 행복이다.   그 행복에 새삼 감사하고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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