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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Apr 28. 2019

능동적 허무주의라는...

짜라스투라가 하는 이야기

살면서 내가 맞이했던 수많은 원인과 결과 중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그 틀이 짜인 듯 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해 왔다.    물론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몇몇 가지의 우연이 몇몇 가지의 각도로 맞물려 예상치 못하는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 내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내 삶 속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적어도 내 삶 속에선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나는 것보다 더 기적적인 현상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로서 불명예스러운 일 이기는 하지만 나는 군 생활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가 될 시기에 나는 ‘자택 배치’가 된 것이 그것이다.   내가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때에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의 병원 생활로 정신이 없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어 연명치료에 대한 올바른 선택이 당사자와 보호자들에게 주어지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산 사람은 살려 놓아야 했다.   내가 입소를 하던 날은 갖가지 의료기기에 매달려 맥박만 유지하고 있는 할머니를 뒤로한 채 오랜 간병으로 지쳐있는 부모님들과도 병원 복도에서 어설픈 작별을 고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앞둔 바로 그때에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난 3일간의 특별휴가를 얻어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간병기간 동안 긴장을 놓지 않던 어머니가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고 우연히 어머니와 함께 동행하게  된 나는 우연히 진찰을 받게 되었다.   며칠 전 받은 행군에서 무리한 탓도 있지만 귀대하기 전에 영양주사라도 맞아 볼까 해서였다.   그리고 우연히(?) 내 가슴에 드리워진 의사 선생님의 청진기에서 이상이 감지되었다.      고개를 갸우뚱한 의사 선생님은 나를 심전도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고 의사 소견서와 함께 봉인된 봉투를 가지고 귀대를 한 나는 그날로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군생활을 정식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전역을 하게 되었고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지병을 얻은 대신에 군생활에 묻힐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도 함께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내게 발생한 이 사건은 몇 가지의 신기한 우연이 겹치며 생겨난 것이고 이 기적은 내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사실 2년 남짓한 시간을 덤으로 얻은 것이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걷는 로드맵은 수정되고 그 수정된 괘도가 그 이후의 내 모습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보면 그것은 분명 인과응보로는 설명이 힘든 부분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적 같은 일들은 가끔 발생해 왔다.   ‘가끔’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 당시에는 모르고 지난 내 짧은 기억 속에 묻혀버린 사건들은 포함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운이 좋았다’라든가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라든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 내 주위에서 발생한 기적 같은 일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게 되고 아내를 만나게 되고 이민을 오게 되고 레스토랑 비즈니스를 하게 된 모든 지나온 시간들은 우연 히 겪게 된 일들과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로 인해서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껏 발생해온 그 수많은 우연의 집합체를 내가 주도한 게임의 산물로만 인식해 왔다.   흔히 얘기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는 나의 계획과 노력과 행운이 함께 한 것으로 생각했었고 ‘참담한 결말’을 보게 되었을 때는 나의 게으름과 우둔함과 불행으로 치부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명백하게 발생해온 설명하기 힘든 우연한 사건들도 그저 단순한 우연으로 지나쳤을 뿐 그 기적 같은 일들이 보내주는 신호를 깨닫지 못했다.   


운이 좋으면 100살까지 살 수 있다는 세상에서도 이미 반 이상을 살아와 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그 신호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 번도 누구에게서도 검증된 적이 없는 것들이기에 ‘이해’라는 표현보다는 ‘해석’이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기적 같은 일들은 나를 이루는 내 몸안의 우주가 보내는 신호이고, 동시에 내가 서있는 우주의 괘도가 보내는 표현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궤적은 우연과 기적의 형태로 내 주위에서 매 순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그 우주의 괘도에 맞추어 열심히 살아가게끔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확실성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괘도 이탈을 초래한다.   미래라는 것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일은 지금 현재 내 몸을 구성하는 우주가 내가 속해있는 우주의 질서에 정확하게 맞추어 돌 수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니체의 허무주의나 불교의 공 사상에 어느 정도 접근하게 된다.   즉 내가 살아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사건 사고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오늘 내가 속해있고 나를 만들고 있는 환경들 역시 어느 정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괘도라는 인식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허무주의에 근거한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은 마치 앞면과 뒷면처럼 항상 같이 존재한다.   수십광년을 흘러왔고 또한 수십광년을 흘러갈 우주의 섭리와 괘도 안에서 고작 100년 남짓의 순간을 머물게 되는 우리가 과연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괘도를 이탈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이 허무주의의 시작이고 불교에서 얘기하는 색즉시공에 닮아있다.   


중요한 것은 이 허무주의의 바탕 속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기적이 일어나서 다행이었다던가 운이 좋았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기적은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그 우주를 만드는 우리의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찰나의 시간 속에 정해진 괘도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허무주의의 세계에서 걱정과 근심, 비교와 시기를 즉각 내려놓고 매 순간순간을 능동적이고 진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일 것이다.   이것은 서점에 가면 수없이 진열되어 있는 여러 가지 자기 개발서나 긍정 철학서들이 주장하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는 것이 나중에 그것이 큰 힘으로 재합성된다’라는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진실로 눈 깜짝할 사이를 살다 사라지는 우리가 설령 저지를 수 있는 실수나 낭패, 부끄러움과 실패 등은 우리가 우리 삶을 다하는 순간 그냥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하찮은 먼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철학자 고 김진영 님의 산문집 ‘아침의 피아노’ 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결국 능동적 허무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을 말한다.   내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마음껏 춤출 때 우리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   ‘삶은 고통’이라는 허무주의 속에서 순간에 충실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건너뛴다면  그것이 곧 죽음인 것이다.

내 딸아이가 좋아하는 16살의 천재 싱어송라이터 Billy Eilish는 섬뜩하지만 확실하게 이렇게 전한다.

“Everyone is gonna die and nobody is gonna remember you so, fuck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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