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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ul 23. 2021

흐린 뒤 맑음

[사진과 단상]남아프리카공화국케이프타운 테이블마운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카페를 나섰을 때였다. 주변을 둘러싼 기운이 묘했다. 사람들은 절벽 근처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하늘은 여전히 시커먼 구름으로 덮여있었는데 파란빛과 초록빛이 문득 보였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테이블마운틴이 숨기고 있던 우락부락하고 위압적인 몸매, 그 아래 케이프타운과 남대서양이 펼쳐졌다. 여행지에서 겪은 그토록 짜릿한 기쁨은 처음이었다. 소름이 돋아 머리털이 빳빳해지고 눈과 입을 닫지 못했다. 


오전에 테이블마운틴에 올라 볼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도시도 바다도 산의 형태도 아무것도 없었다. 위치는 테이블마운틴의 평평한 정상부였으나 구름 속을 걷는 일은 안개 자욱한 늪지대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보이는 것이 없어 그대로 내려가는 길로 향했건만 반지원정대의 길이 이 정도로 애달플까. 전날 내린 비로 바위는 축축하고 길들은 질퍽한 진흙탕이었다. 1/3 정도 내려갔을까, 아래로 이어진 길은 도저히 걸어 나갈 수 없는 뻘밭 같았다. 친구 두 명의 신발이 그곳에서 명을 다했다. 도망치듯 케이블카가 있는 정상부로 다시 올라가는데 축축한 바위에 친구 하나가 미끄러지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다음날부터 친구는 아프리카에서 삼성 핸드폰 수리점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상부에 돌아오니 진이 빠졌다. 전날 희망봉에서도 잔뜩 낀 구름만 보다 돌아왔고 테이블마운틴에서는, 여행 도입부임에도 큰 피해가 있었다.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8월의 겨울 날씨였고 산은 높아 몸이 차가워졌다. 기념품이나 잠깐 보고 커피 한 잔으로 몸 녹이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한 예감이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이 터졌고 탄성도 터졌다.


아름다운 풍경은 세상천지에 많다. 잘 알려진 명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네 골목도 마음을 담아 자세히 바라보면 너무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짜릿한 기쁨으로 몰아넣는 광경은 극적인 스토리가 필요하다. 잔잔한 드라마도 좋지만, 자극적인 반전 드라마의 맛을 꺾기는 쉽지 않다. 테이블마운틴은 한 편의 제대로 된 반전 드라마를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흐린 뒤 맑은 날씨가 춥고 지친 마음에 미친 영향은 따뜻한 커피보다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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