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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an 02. 2022

2021년 마지막 불빛에 홀린 단상

2021년 하반기는 무거운 어깨와 답답한 가슴으로 보낸 탓에 자신을 향한 측은지심이 대단했다. 그러던 와중에 각종 미디어에서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미디어 파사드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나도 SNS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보게 되었다. 엄청난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어떤 날은 남아있는 잔상에 만족할 수 없어 유튜브 4K 영상으로 찾아보기도 했다. 어쩌다 SNS에서 다시 스칠 때면 마음이 요동치고 사고가 멈췄다. 그래서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번 연말에는 서울로 휴가를 간다.'


나는 서울시민이었던 사람으로서, 지독한 서울 부심으로 서울 앓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연말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엔 명분이 약하다. 결정 사유의 8할은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미디어 파사드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드시 내 눈앞에 이 광경을 두고 아주 잠시라도 서있고 싶었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날 연가를 내고 눈부신 불빛을 향했다. 서울시청과 플라자호텔, 조선호텔을 지나는 길의 끝에 그 불빛이 있었고, 'Magical Holidays'가 펼쳐졌다. 그 이름에 걸맞게 건물 외벽은 쏟아지는 금빛 폭포였고 서커스 단원들의 쇼가 진행됐다. 거대한 스케일에 환상을 넘나드는 공연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공연이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불빛 아래 매달려 있었다. 불빛의 마법에 홀린 수백의 인파가 넘실거릴 때마다 황금빛 물결이 쳤다.


그 앞에만 한참을 서있었기에 이제 실물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크지 않지만, 여전히 사진과 영상은 다시 봐도 아름답다.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놓게 만들었을까. 2021년 연말의 신세계 본점이 대단한 품질의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인 탓도 있겠지만,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지만 너무 어려운 단어인 행복. 단언컨대 행복이 느껴졌다.


우리의 일상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번쩍 눈을 뜨고 천장과 시계를 번갈아 보다 보면 내가 출근을 해야 한다는 믿을 없는 사실에 놓여있음을 깨닫는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사무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보면 어젯밤에 쌓여 이미 진흙탕이 눈처럼 업무 메일이 쌓여있고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다. 일을 하다 보면 거북목이 되어 수많은 글자, 숫자와 씨름하고, 수화기 너머 복잡하고 어려운 요청들, 그리고 정작 요청에는 응답 없는 메아리들로 머리가 아프다. 직장상사의 무리하고 부적절한 업무지시로 자리에 돌아올 때면 한숨만 나온다. 전선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이미 해가 저문지는 오래이고 벌써 다음 업무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하물며 집에 가더라도 피곤한 잠시 눕히지 못하고 가정에서의 나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정해진 굴레 속에 너무 바쁘다.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를 둘 틈이 없으며 혹시 잠깐의 여유가 생기더라도 과부화된 머리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생각이나 감상을 최소화한다. 그저 가다 멈추다를 반복한다그리고 계속적으로 특정 과업을 위해 기능하기를 요구받는다. 조직이든 어디에서든 하나의 기능으로서 내가 가지는 의미가 먼저 인지되고,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내가 아닌 내 기능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잘 없다. 나의 기능으로 받아들여지고 말고가 결정된다.


그런 우리가 추운 겨울바람 앞에도 따스한 불빛을 만나게 되면 그 앞에 자연스럽게 멈춰 선다. 불빛을 응시하다 보면 마치 그 빛에 의해 주변의 어지러운 것들이 맹점에 놓인 것 같아진다. 잠깐이라도 세상의 어지러운 것들이 눈 밖으로 사라진다. 내 주변의 어지러웠던 것들도 불빛에 순간적으로 녹아 사라지고 나를 느끼게 된다. 화려한 불빛은 내 주변의 것들을 걷어내고 온전히 나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이번 신세계 미디어 파사드는 초입에 보면 마치 쇼에 초대받는 것 같이 꾸며졌다. 편지라든가 인사하는 서커스 단장의 이미지가 우리를 환영한다. 관람객은 초대를 받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조건 없는 환영을 받게 된다. 환영인사를 시점으로 나는 극 속에 빨려 들어간다. 영상이 진행되는 동안 겪게 되는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신세계 백화점을 통째로 사용한 오직 나를 위한 크리스마스 공연 무대인 셈이다. 거대한 서커스 천막 안에 들어가면 방긋 웃는 단원들이 나만을 위한 공연을 펼친다. 일상 속의 꽉 막힌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환대까지 받게 되는 공간이다.


우리 일상에 존재 자체로서 초대를 받고 환대를 받는 경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찾는다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거의 전부일 것이다. 어딜 가나 반가움의 대상이었고 환영받았다. 하지만 조직의 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없고, 내가 누구인지 거의 잊고 산다. 내가 기억하던 내 존재는 내 기능에 잠식당한 것인지 소멸된 것인지도 모르고 사는게 보통의 삶이다.


백화점 앞에서 영상을 열 번쯤은 본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면 인파가 너무 몰려 경찰버스까지 대기하고 있던 곳이었지만, 불빛과 영상 속에 비친 드러난 내 모습과 서커스단의 대가 없는 웃음과 환영은 언제까지고 만끽할 수 있었다.  매년 겨울 불빛 장식이 거리를 밝히면 마음 따뜻해지고 좋긴 했지만 올해만큼 특정 장소에 간절하게 가고 싶었고 그 앞에서 가만히 서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생활이 본격화되고 조직에 점점 녹아들어간 것뿐만 아니라 특히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세상살이가 팍팍해져서 그런 건지, 분명히 낯선 불빛이었지만 포근하고 반가웠다. 누구라도 오롯이 자기 자신을 향한 온기와 환영의 손길을 거부할 사람은 없기에, 올해 신세계의 불빛 장식은 백화점 건물만 빛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존재 의의를 빛내준 고마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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