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밀러 갑니다!
반바지를 입을 수 없을까? 여직원들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데. 사회통념상 반바지는 예의에 어긋나니까? 하긴 오래 전부터 공적인 곳에서 반바지를 입는 건 결례로 여겨져 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우락부락한 알에 숲처럼 털이 우거진 남자의 다리에 안구가 테러 당하는 느낌보단 깔끔하게 피트되는 긴 바지가 훨씬 보기 좋은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은 왜 반바지 자체를 금기시해왔던 것일까. 반바지가 얼마나 시원한데. 그리고 남자는 특히 신체 구조상 통풍이 시원하게 잘되는 바지를 입어야 건강에도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때문일까? 내 주변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너무나 소중해서 머리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제발 자라지 말라며 털을 깎다 못해 뽑는 지경에 이른 사람도 있다. 우리 몸 이곳 저곳에 자라나는 털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배워왔다. 그리고 털이 나는 부위는 소중한 곳이니 조심히 간수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요즘에는 꼬불거리는 털 없이 매끈한 피부를 갖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다리털은 물론 수염, 겨드랑이, 가슴 그리고 급소… 털을 드러내며 야성미를 어필하기 보다 제모를 통해서 뽀얀 피부를 가진 아기처럼 다시 태어나고픈, 조금이라도 젊어지고픈 그런 욕망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깊이 하고 있진 않았다. 그저 털이 나면 나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신체에서 자유롭게 머물거나 떠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매년 갱신되는 찜통 더위 때문인지 어느 순간 털은 습하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내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털들을 찾아내 적폐로 규정하고 하나씩 살펴보며 원칙대로 청산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파악할 건 현재 내 몸의 털 상태. 나의 체모 관리 현황을 갱신해보았다.
나는 코와 턱에 있는 수염은 잘 기르면 멋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하지만 내 주위의 여자들은 하나 같이 수염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외국인이라서 그런 멋을 낼 수 있던 것 같다. 내가 하면 큰일나겠지. 어쨌든 나는 질레트 프로글라이드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매일 아침 면도한다. 고급 전기 면도기도 사용해봤지만 오히려 이 카트리지 면도기가 훨씬 깔끔하게 내 수염을 잘 깎아준다. 사용하기도 편하고.
이거 굉장히 중요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콧속에서 자라는 털은 길어지면서 밖으로 마구 삐져 나오는데 이게 그렇게 보기 흉할 수가 없다. 혐오스럽기도 하고. 코털은 먼지를 걸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관리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길거리 시장에서 팔던 3천원짜리 중국산 코털제거기를 썼었다(왼쪽). 털은 잘 제거됐지만 스위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 완성도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1만 원대의 필립스 NT3160을 새로 샀다(오른쪽). 물에도 씻을 수 있고 모터도 강력해 제품은 훌륭했지만 의외로 털이 잘 깎이지 않았다. 동그랗게 회전하는 중국산 코털제거기와는 달리 빠르게 상/하로 움직이는 블레이드가 나와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현재는 혼돈 속에 두 가지 제품을 혼용하면서 가끔씩 관리하는 중.
여자와는 다르게 남자가 겨드랑이 털을 밀면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있다. 다행히 나는 액취증이 없고 팔과 가슴 사이로 털이 고개를 빼꼼 내밀 정도로 풍성하지 않아서 따로 관리는 하지 않는다.
가슴털은 야성미의 상징이고 나 역시 탄탄하게 튀어나온 가슴근육과 함께 약간의 털이 영글어진 남성적인 몸에 대한 로망이 있긴 하지만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가슴은 매끈해서 관리는 딱히 필요하지 않은 상태다.
내 다리에는 정글이 있다. 아마 모기가 들어오면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할 거다. 일회용 면도기로 종종 밀어보긴 했지만 생각처럼 미끈하게 되지 않고 피부가 빨갛게 일어나기도 했다. 털이 왠지 갈수록 굵어지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회사에서는 반바지를 못 입어도 놀러 나갈 때 깔끔하고 캐주얼한 옷차림에 수북한 다리털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꾸준하게 제모법을 모색하는 중.
브라질리언 왁싱이 유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드러나지 않는 급소까지 매끈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답은 ‘필요하다’ 였다. 여름철에 금방 쉬어버리는 김밥처럼 시큼한 악취가 올라오기 때문만은 아니고 속옷이나 수영복 틈새로 털이 보일지도 모르는 아슬함 때문만도 아니었다. 습기나 세균 번식을 막아 위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중목욕탕에 들어갈 때 어떡하지 라는 걱정 따위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브라질리언 왁싱은 그냥 털을 자르는 게 아니라 모근을 근본적으로 약하게 만들어 자라는 속도를 늦추는 ‘시술’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수만 원의 금액까지 지불하며 샵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나의 급소를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기처럼 뽀얗고 매끈한 피부를 갖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 나체로 있어야 한다는 부끄러움과 약간의 수치심이 더 컸으니까. 그리고 여러 후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결과에는 만족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지옥을 경험하고 왔다는 소감.
그래서 일회용 면도기를 갖고 나름대로 시도를 해봤지만 역시나 완전한 자유를 얻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걸어 다니거나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피카츄 전기 공격에 당하는 듯 순간 순간 쓰라리기도 했다. 나의 소중이를 어떻게 소중하게 지켜야 할까 고민이 된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곳을 거울로 비춰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나를 비웃지 말라. 당신들에게도 다 하나씩 있는 거잖아. 그저 나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 어린 마음에서 시도했던 순수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곳의 상태는 다소 징그러웠다.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많이 울다가 웃었던가?
급소 부위를 제모했을 때 일회용 면도기로 함께 정리해봤던 적이 있다. 우선 걸음걸이가 가뿐해진다. 두 손바닥을 맞대어 비벼본 후 손등끼리 비벼보라. 두 다리로 걸어 다닐 때 느껴지는 마찰이 손등끼리 비비는 바로 그런 느낌이다. 이 부분은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배변 시의 느낌도 다르다. 뒤처리를 할 때도 훨씬 깔끔하고 뽀송하다. 권장하긴 하지만 면도기로 어설프게 처리했다가는 이틀 뒤 역시나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주의할 것.
놀랍다.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더 다른 제모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깔끔한 반바지 캐주얼 룩에 도전하기 위해. 사랑하는 나의 몸을 더 위생적이고 소중하게 다뤄주기 위해. 그래서 우선적으로 공략하기로 한 곳은 다리털. 그리고 급소. 잘라보자. 밀어보자. 없애보자. 이 꼬불꼬불하고 지긋지긋한 털. 과감하게.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그래서 이렇게 준비했다. 일회용 면도기나 브라질리언 왁싱을 대체할 아이템. 다리털을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는 블레이드가 장착된 블락(blak)의 ‘바디 트리머’. 그리고 궁극의 제모 크림으로 소문이 자자한 ‘니크린(Niclean)’이다. 얼른 슥슥 사용해보고 민둥산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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