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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하는 나라에서 생긴 일

출입국심사 때 영어 패치 업데이트 꼭 받아가세요

최근에 온라인으로 하는 영어 말하기 모임에 들어갔다. 영국에서 갓 돌아온 그해 여름에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오프라인 기반으로 잠시 운영해 본 적도 있는데, 예전에 학원에서 학습 보조 일을 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나는 학습 의지가 딱히 없는 이들에게 의지를 심어 주는 일에는 영 젬병이다. 굳이 없는 걸 만들어야 하나? 생각하는 입장에 가깝다(그래서 학원에서 잘린 것 같다). 대신 이미 의지의 씨앗이 심겨진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는지에 관해서라면 내 일이 아니고 딱히 금전적 대가를 받는 게 아니더라도 절로 관심이 생기고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아직 모임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수준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영어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상대가 생겨서 기분이 좋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디스코드 켜서 모임원들을 만나고 시시콜콜한 익명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게 정말 큰 변화인 게, 처음 영어 하는 나라 체류를 결심했을 땐 뭣도 모르고 내심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불안이 워낙 높아서 위기 상황이 오면 어떻게든 나 자신을 수습해 줄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의 퓨즈가 끊기는(?) 경험을 하고 한국어 하는 나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 경험이 값졌던 건, 특히 언어에 관해서라면 물리적 공간을 옮긴다고 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음을 배운 탓이다. 나는 뭐, 진짜 출입국심사 지날 때 나한테 영어 패치 내장된 칩이라도 내 귀 위로 꽂아 준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Hi.”, ”Hello?”, ”Cheers!”, ”Thank you.”, ”You, too!(이건 좀 고난도)”


내가 소위 영어 하는 나라에 가서 배우고 온 표현들이다. 딱 저 정도를 떨지 않으며 말하고, 이제 좀 살 만해질랑말랑할 즈음에 한국어 하는 나라로 돌아왔으니까, 누군가는(이라고 쓰고 우리 엄마라고 읽는다) “또 허송세월 보냈네, 그러느라 쓴 돈이랑 시간이 아깝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자 기한이 남아 있기도 했고 코로나19 초기 상황이라서 어떻게든 여기서 돈을 벌어서 재정착을 시도해  요량이었다(영국은 워킹홀리데이—YMS 비자 기한이  2년이다). 그런데 , 지금은 비자 기한도 진작에 끝났고 2 전에 비하면  생활도 둥둥 떠다니는 대신 뿌리를 내리고 제법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갓 성인이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국어 하는 나라 탈출’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었다. 다른 나라를 잘 모르니까 오히려 어디든 가자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도 가려고 했고, 웬 블로그를 탐독하면서 북유럽 취업 이민을 꿈꾼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실행에 옮긴 건 1년 여의 영국 체류 생활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여자가 칼을 들었으니 무라도 자른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영어 하는 나라에 가 보는 경험으로 내가 배운 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출입국심사 때 이민국 직원이 영어 패치 내장 칩을 꽂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고(어쩌면 인종 차별의 일환으로 나를 제외시킨 걸지도 모른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제법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왜냐하면 런던 한식당이나 중식당 등지에서 나처럼 누락된 이민자들을 제법 많이 봤거든) 또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편안하다면 앞으로는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었다.


살면서 나는  삶이 좀처럼 편해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 같은 단어는 나처럼 땅을 제대로 딛지도  하고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사전 안으로 들어와 주지  했다. 그런데 영어 하는 나라에서  (혹은 매우 여러 ) 넘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 어느   발이 땅을 딛으며  아래 지면의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혹시 나처럼 영어나, 혹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 하는 나라로 갈 계획 혹은 꿈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길 권하고 싶다.


우리가 거기 가는 목적은 말과 문화를 배우는 게 아니라, 넘어지러 가는 거라고.


넘어져 보면 이상하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며 뭐든   있을  같은 무한 동력(이라고 쓰고 동기부여라고 읽는 힘) 얻게 된다(살짝 뻥뛰기한 표현인  인정).   넘어지면 다음부턴 다시 넘어질 걱정을 하지 않는  가능해진다. ‘, 어찌 됐든 넘어지기밖에  하겠어?’ 그리고 나는  동력 덕분에 이젠 영어를 거의 떨지 않고   있게 되었다. 영어를 잘한다는 말은, 정확한 영어를 유려하게 뱉는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말이 나오게 하는 사고의 흐름을 가로막던 머릿속 장치를 마침내 없앴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드디어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고   있겠다. 그리고 나만의  작고 귀여운 성취는 영어 하는 나라가 아니라 한국어 하는 나라에서 시작되어 한국어 하는 나라에서 계속해서 발전 중이다. 영어 하는 나라의 역할은 그저 원한다면 잠시 머무는 작은 정류장일 .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해당 국가의 언어를 쓰며 살지만 정작 우리를 물들이는 건 언어라는 겉껍질 속에 진득하게 자리잡은 생각이라는 이름의 속살이다.


웨일스 에버리스트위스에서 2015년에 찍은 사진. 이때 아이폰4S 쓰던 시절이라서 사진이 이렇게 쓸 게 없나? 했는데, 20년 사진 폴더를 열어 봤더니 그냥 내가 문제인 듯…


영어고 나발(?)이고 달리 외국으로 나갈 계획이 없는 분이라도, 여기 넘어져  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민트리 님의 맨땅에 헤딩 시도 모음집 〈츄라이, 츄라이, 민츄라이〉를 참고하시면 넘어지는 경험을 가성비 좋게  보실  있으니까 많관부! 일일이 실패할 시간도 부족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남의 실패에서 쏙쏙 배우며  도전의 가능성을 높여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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