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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영광도 오늘의 오욕도 모두 해프닝

지금은 종영한 〈라디오 천국〉의 작가였던 김성원 씨가 심야 방송의 꽃(?) ‘그녀가 말했다’라는 제목의 에세이 꼭지에 내보냈던 원고를 모아 사진과 함께 실은 동명의 책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어제의 영광도 오늘의 오욕도 모두 해프닝.” 사실 지금 시외버스 타고 점촌에 가는 중이라서 정확한 본문 확인은 집에 가야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요지는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당시 2010년대 초반, 내 인생은 일희일비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 문장이 좀처럼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기억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이 문장을 요즘은 거의 매일 되새김질한다. 한문도 아니고 외국어도 아닌데, 읽을 수 있고 머리로는 무슨 뜻인지 아는데 마음으로만 와 닿지 않던 문장이 마침내 어느 날 내 마음의 문을 똑똑 두드릴 때면,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아가는 보람을 솔찬히 느낀다.


어제는 결과 통보를 기다리던 곳에서 아쉽지만 같이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매일 지겹게 받던 “더는 채용 절차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든지 “우리 회사에 관심 가져 줘서 고맙다”든지 하는 상투적인 문구 대신,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이 있었고 관련 부서들에서 의견을 취합해 보니 결국 다른 지원자를 최종으로 고르게 되었으며 다음에 또 한국어 번역가가 필요할 일이 생기면 (그리고 내가 여전히 프로젝트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면)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이곳이 내가 처음으로 지원한 곳이었다면, 내게는 메일의 내용보다 테스트 결과가 더 중요했을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그동안 실패를 알리는 온갖 결과 통보 메일을 받아본 덕분에, 이게 그냥 평범한 실패가 아님을 마음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은 애초에 이게 실패인지도 이제 잘 모르겠다. 덕분에 좋은 회사를 알게 되었고, 더 좋은 요율을 받는 환경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운 좋게 기회가 닿아 재밌는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뭐 그런 운은 언제나 무작위 랜덤인 거니까. 운보다는 내가 직접 일군, 그리고 앞으로 일궈 갈 성취에 집중하며 일희일비하지 않고 좀 더 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끈덕지게 해 보려고 한다.


원래는 이 얘기를 쓰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평소처럼 글이 진지해졌다.


올여름에 처음으로 내가 작업한 번역서가 나왔다. 처음이니까 사인은 너무 거창할 것 같고 대신 뭐라도 쓸 만한 문구를 정하면 좋을 것 같아서, 언젠가 내가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더글러스〉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듣고 훔쳐 쓰고 있는 문장 ‘Your Pleasant Is My Business.’를 써 주면 좋을 것 같아, 지금 한 3부쯤 이미 사인본(ㅋㅋㅋㅋㅋ)을 주변에 준 상황인데, 불현듯 “근데 왜 pleasant지? 보통 my pleasure라고 하지 않나?”라는 내가 진작에 고민해 봤어야 할 의문이 떠올랐다. 마치 레이철 블룸이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보물 같은 넘버 ‘웨스트 코비나’ 가사 중 이곳을 ‘인랜드 엠파이어’ 지역이라 쓴 뒤, 약 4년 후 종영 기념 특별 편성된 공연 실황에서 “잠깐 시간 내서 검색해 볼걸”하는 후회의 말을 가사에 덧붙인 상황처럼(실제 웨스트 코비나는 ‘인랜드 엠파이어’가 아니라 ‘샌 가브리엘 밸리’ 지역에 속한다고 한다).


약 3년 전 내가 왜 해나 개즈비의 말을 My pleasure가 아니라 My pleasant로 알아들었는지, 그리고 애초에 왜 거기에 의문을 갖고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그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형이라서 문장이 말이 안 된다.”고 고쳐 주지 않았는지(?)…. 이러저러한 잡다한 후회와 창피함이 잠시 밀려들었지만, 뭐 이럴 때 앞서 이야기한 김성원 작가의 문장을 되새기면 금세 마음이 차분해진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하며 산다. 우리에게 필요한  근원적으로 실수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아니라(어차피 가능하지도 않다), 그냥 어제보다 오늘 조금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심지어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도 억울한 일이 왕왕 벌어지기도 한다. 어릴  그냥 나의 무고를 증명하면 모든  해결되리라 믿었는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같다. 그러니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묵묵히 돌파해 나갈 수밖에.


나를 포함해, 인간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그런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는 새삼 참… 얄짤없는 곳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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