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투자 철학 (Ver 1.0)
블록체인은 미래를 바꿀 것입니다. 토큰 이코노미가 작동하면 모든 시장 참여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입니다. 더 나아가 주주만 독식하던 주식회사의 한계를 극복할 거라는 기대도 줍니다. 기반기술인 암호화폐(가상화폐)는 대규모 자금을 빠르게 유치하고, 사용자 간 쉽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가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패러다임 시프트 지점에 와 있습니다.
저 역시 하루빨리 블록체인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투자자로서 바라보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판세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토큰 이코노미가 실생활에서 작동하는 사례는 아직 스팀잇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가 지배적인 위치에 오를지 모릅니다. 둘째, 토큰 가격에 사람들의 기대가 지나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ICO를 진행한 토큰의 시가총액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에 비해 대단히 높은 수준입니다. 즉, 현재 가격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투자하기에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투자자
ICO는 보험 사업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큰돈을 먼저 받고 보상은 나중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자의 합의를 충족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부터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선수취 - 후지급 모델은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특정한 의도로 사용할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합니다. 게다가 사업자는 임의의 화폐를 직접 발행하기 때문에 채무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채무보다는 확실히 질적으로 좋은 셈입니다.
반면 투자자는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VC는 10개의 기업에 투자하면 9개 기업은 실패하거나 그저 그런 수익을 거둡니다. 하지만 가장 잘 투자한 곳에서 주는 수익이 나머지 포트폴리오 모두를 합한 수익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그들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습니다. 이는 소수의 탁월한 스타트업이 독점적 지위를 가질 정도로 성장하면 다른 수많은 기업들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커지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ICO는 처음부터 웬만한 상장기업의 시가총액을 뛰어넘는 자금을 끌어온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가격대의 지분 획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례로, 1년 가까이 ICO를 진행한 EOS(이오스)의 시가총액은 10조 원이 넘습니다. 국내 대표 IT기업 격인 카카오, 엔씨소프트보다 높은 금액입니다. 이는 n조 규모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거나, 파이가 아주 큰 시장에서 의미 있는 점유율을 가져와야 도달 가능한 규모일 것입니다. 다른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달라지겠지만) 뭔가 있어 보이면 2-300억은 우습게 조달합니다.
물론 토큰에는 화폐의 교환 기능도 있다 보니 시가총액만으로 가치를 단정 짓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요소들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지금 나오는 블록체인 모델이 영원히 유지된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므로 청산 시점의 참여자 이탈도 함께 고려하려 합니다.
소수의 프로젝트가 블록체인 생태계를 주도한다면 카카오나 엔씨소프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것입니다. 저 역시 몇몇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대부분 비싸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비즈니스라 해도 너무 비싸게 사면 위험한 투자가 되어버립니다. 현재까지 진행된 ICO 프로젝트들의 시가총액은 미래 가치가 너무 이른 시점에 가격으로 반영되었다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습니다.
암호화폐 투자 시 불안 요소
현재 가격이 매력적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시장의 검증조차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즈니스는 그럴듯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 달성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수요가 예상보다 적다거나, 강력한 경쟁자의 진입으로 점유율이 줄어드는 식의 문제는 비일비재합니다. 단순히 많은 돈을 쥐고 있다 해서 이런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블록체인 비즈니스에 아직 압도적인 플랫폼이 없다는 점은 기회이자 불안 요소입니다. 최근 EOS(이오스)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이변 없이 이더리움의 승리로 끝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글이나 페이스북, 국내에서는 라인과 카카오에서 갑자기 강력한 플랫폼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프로토콜과 Dapp의 영향력 관계도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습니다. 시장의 규모나 승자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불확실성이 큽니다. 게다가 토큰 이코노미에서는 모든 참여자들이 지분/기여도에 비례하여 혜택을 나눠가져 갑니다. 높은 리스크에 비해 투자자가 얻는 수익은 기대만큼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암호화폐 투자관
기대 수익의 감소는 투자자에게 더 정확한 판단을 요구합니다. 이에 좀 더 보수적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암호화폐에 적합한 투자 기준이 정립되어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한 탓에 확실한 것을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분야라 해서 무턱대고 색다른 접근법만을 좇는다면 가격 변동성에만 기대 요행을 바라는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 철학은 기본에 충실하려 합니다. 핵심은 블록체인 비즈니스도 결국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암호화폐 투자는 비즈니스 모델과 연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해당 프로젝트의 토큰 이코노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실생활을 유의미하게 바꿀 프로젝트가 최우선 투자 대상입니다.
다음으로 시장에서의 반응을 지속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에게 검증받는다면 해당 모델의 펀더멘털은 확실하게 인정받았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존에 투자한 프로젝트의 지속 가능성 여부를 알려줌과 동시에 보수적인 판단으로 놓쳤던 프로젝트가 우연한 계기로 매력적인 가격에 도달했을 때 놓치지 않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직 시장의 검증을 받지 않았다면 그만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므로 일정한 할인율을 적용하는 근거가 됩니다.
(personal)
그런데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기존에 없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요합니다. 과거의 방식만 고수했다가는 자칫 시대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이에 두 가지 관점을 추가하였습니다. 먼저 새로 탄생하는 블록체인 메커니즘을 미래의 환경과 연결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재가 아닌 미래의 환경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은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시도입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메커니즘이 본질적으로 주는 효용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상함으로써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제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의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끝으로, 열린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기존의 지식을 새로운 패러다임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잘못된 사고가 고착화될 우려도 있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까 몹시 두렵지만) 지금까지는 맞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하다가도 상대방이 타당한 반론을 제시하면 고민하다 입장을 빠르게 바꾸곤 했습니다. 제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입장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 2018년 5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2018년 9월 현재, 라인은 링크 체인(http://link.network/)을 공식으로 오픈하여 링크코인(LINK)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역시 자회사 그라운드X를 통해 클레이튼 출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