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8. 광진포럼
입사 초 매일의 상담이 황당과 당황의 경계에 있던 무렵, 파격적 전화를 받았다. 임신 중 근로시간을 단축한다하니 임금 삭감도 모자라 바닥의 ‘껌’을 떼라는 병원장의 지시. “임신 초 근로시간 단축은 법으로 보장될 뿐만 아니라 임금 삭감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임신노동자를 쫓아내려는 의도가 훤한 원장에겐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담자는 2달 후 종이 두 장을 쥐고 센터를 방문했다. 기존 근로계약서와 바뀐 근로계약서 각 1장, 삭감된 임금과 계약 기간을 명확히 하는 내용이 명시되었다. 법률 자문을 받아 작성된 근로계약서의 글자 단 몇 자로 노동조건이 바뀌게 된 내담자는 자녀 출생 무렵까지 몇 건의 통화를 더 해야만 했다. 임신 기간 마지막까지 악랄한 회사를 다녀야했던 내담자가 안쓰러웠다.
2018년을 기점으로 모·부성보호 3법이라 하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고용보험법이 계속하여 개정되고 있다. 임신 기간 동안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하는 ‘임신기 시차출퇴근제’가 신설됐고, 자녀가 출생한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었던 ‘육아휴직’은 임신 기간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해당기간을 출근한 것으로 보아 연차유급휴가 발생 시 불이익이 없게 했다. 육아기에 근로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은 육아휴직 기간을 전부 이용하면 사용할 수 없었지만, 육아휴직과 별개로 1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배우자 출산 시 사용할 수 있는 ‘배우자 출산휴가’는 종전 5일(3일만 유급)에서 10일(전체기간 유급)이 됐다. 이밖에도 가족돌봄휴가, 가족 돌봄 근로시간 단축과 같은 규정 등이 신설되어 출산·육아기에 있는 노동자의 모·부성보호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모·부성보호를 위한 법 개정·정책의 곳곳에서 정부·국회의 왜곡된 시선이 보인다. 최근 센터에서 용혜인 의원실과 추진하고 있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시의 연차유급휴가 삭감되는 연차발생일수의 경우 입법 미비로 누락되었다고 생각하고 차치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법 개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육아휴직을 순차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두 번째 육아휴직자에게 월 임금의 100%(상한액 250만원)를 지급하는 이른바 ‘아빠육아휴직 특례’는 배우자가 동시에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경우 적용되지 않는다. 육아를 둘이서 하면 수월하니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육아는 혼자서도 충분하다’라고 폄하하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제도는 개편되어 내년부터 3+3 육아휴직 특례로 시행되지만 그 혜택을 생후 1년 미만의 자녀로 제한하는 등 육아를 단순히 생각하는 인식은 여전하다. 이외에도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과거의 인식이 깔린 정책들이 여럿 보인다. 정책입안자가 이미 자녀를 양육해온 입장으로 ‘우리 때보다 훨씬 나아졌네.’라는 꼰대 의식을 갖고 설계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선에서도 차별이 이어지고 있다. 고용노동청에 모·부성보호와 관련한 사건으로 진정을 제기하면 근로감독관은 냉담하기만 하다. ‘일도 아닌 일로 진정을 제기했다’는 태도로 일관하기도 한다. 근로기준법과 고용평등법에 다른 규정들과 나란히 명시된 내용이고, 진정 절차도 규정되어 있지만 ‘번외사건’ 취급을 받는듯하다. 온 나라에서 자녀출생률을 들먹이고 위기의식을 일깨우지만 정작 당사자인 직장맘·대디는 힘겹기만 하다.
모·부성보호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남양유업’에서는 최근 최연소 여성팀장에게 육아휴직을 했다는 이유로 부당전보명령을 내리고, 견딜 수 없는 양의 업무를 부여해 그만둘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센터에서는 보도되지 못해 가려진 제2의, 제3의 남양유업 사건들을 수없이 상담하고 있다. 육아휴직 종료 후 복귀하려니 복귀를 거부하는 상담은 다반사이고 심지어 복귀자에게 “당신이 복귀하면 다른 팀원 2명을 해고하겠다.”라고 협박도 한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사용했더니 사용자는 물론이고 주변 동료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받는다. 중·소기업에서 일어나는 현실은 대기업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훨씬 자극적이다. 오히려 ‘남양유업’에서 일어난 일이라 주목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는 못난 생각까지 해본다.
대부분의 노동상담이 그렇겠지만, 모·부성보호와 관련한 상담은 당사자를 더욱 비참하게 한다. 결혼한다는 이유로, 임신했다는 이유로, 아이 키우겠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린다. 존중받아야 할 시간을 차별과 괴롭힘을 인고하는 시간이 대신하고 있다. 일도 하고, 생활도 지키려는 소박한 꿈은 멀기만 하다.
어쩌면 모·부성보호제도 개정 과도기에 센터에서 일했는지 모른다. 과도기라는 말로 상담의 복잡함을 대신하고 싶지 않지만, 계속 개정되는 법과 다르게 걸려오는 전화 속 목소리는 다급하기만 하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법 개정이 먼저인지, 문화 개선이 먼저인지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하는 진부한 물음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법 개정이 유독 잦았던 시기의 상담자의 자리를 빌려 생각건대, 개정에 뒤따르는 혹은 선행하는 문화 개선 역시 중요 과제임이 분명하다. 출산전후휴가, 육아휴직 등 모·부성보호 제도를 직접 사용하는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하는 정부에서의 인식이 제고되어야 한다. 정책입안자서부터 임신·출산·육아에 그릇된 인식을 갖는다면 법이 아무리 개정되어도 현장에서의 문화는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모·부성보호와 관련한 노동청 사건에서의 근로감독관의 태도가 대변하고, 육아휴직·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자에 대한 따돌림, 사용자 아닌 동료의 따돌림이 방증한다. 말 그대로의 ‘일·생활 균형’을 위해 쉽지 않은 과제를 풀어야만 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