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5월 09일 노트
이화여대에는 <명작명문의 읽기와 쓰기>라는 수업이 있다. 나는 새내기 시절 이 수업을 들었다. 나이는 서너 살 차이지만 나보다 30년은 더 산 것 같은 경험 많은 언니들 사이에서 쉽게 공감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방청객1로 수업을 수강했다. 물론 깜찍한 포지션을 맡아 학점은 좋게 받았지만, 사실은 조금 더 내가 언니들만큼 깊어졌을 때 수업을 들었으면 좋을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삼 주째 수업에서, 우리는 교수님이 던진 하나의 키워드에 맞게 각자 책을 읽고 발제를 준비하여 왔다. 삼 주째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삼 주째의 수업은 마치 짜여진 극본처럼 나를 빼놓고 모두 한지가 찢어지는 듯한 먹먹한 아픔의 서사시였다. 내게 사랑은 고민의 여지도 없는 행복함이었는데, 나를 뺀 언니들의 사랑은 하나같이 아팠다. 눈물바다의 와중에서 나는 낯설게 생각했다. '그까짓 남자가 뭐라고.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나를 가장 사랑하리라!' 그렇게 언니들의 나이가 되고나니 다짐이 무색하게, 나 역시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가슴이 죄여온다. 앤서니 기든스를 읽어온 나는 합리적으로 사랑하려 노력했으나, 언니들의 이야기마냥 나는 상대에게 나를 의존을 하더라.
무얼 나로서 사랑할 수 있을까. 비단 내 삶의 연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택한 모든 것에서, 정작 바래져버린 '나'를 발견한다. 사실 내 삶은 홀로 고민하지 않아도 아주 사소한 문제부터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학교에 늦으면 아빠가 차로 바라다 주었다. 내가 비용을 고민하면 엄마가 카드를 주었다. 내가 스스로를 사랑만하면 되는 상황에서 당연하게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해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나'의 문제에서 아프게 돼서야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홀로 설 줄 알아야 하는 구나.
낙관론자였던 나의 모습이 어색하게 최근의 하루들은 침잠해있다. 내 마음은 중력을 남들보다 스물 네 배는 더 받는 것처럼 무겁게 짖눌려 있다. 의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채로 하루를 보내면, 불안한 마음에 우문만 늘어간다. 시간을 단 한 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리라. 반짝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코가 시큰하게 아파온다. 햄버거를 우적거리면서도 눈물이 난다. 나 역시도 견디고 나면 더 단단해질 걸 알고있다.
쉽게 주어졌던 고여있는 평온함을 깨고, 생애 처음 홀로 흐르려고 하니 겁부터 난다. 길을 헤맬까 바위에 부딪히진 않을까 겁이 난다. 홀로 서지 못하고 평온한 상태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또 겁이 난다. "이 편지지 위의 얼룩들은 내가 흘린 눈물이 아니라 당신께로 달려가는 긴 호흡들이라오." 프란츠 카프카는 비록 연인에게 보냈지만, 나는 혼자 달려야만 하는 내게 이 글을 선물한다.
아직,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다. 오늘, 답이 없어도 괜찮다. 스스로 더디게 흐른다 힐난하지도, 이리저리 떠밀려 주마간산하지도 마라. 너의 오월은 방치된 뒤쳐짐이 아니라 홀로서는 첫 눈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