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 왔다. 오는 길에 보니 근처에 새로운 카페가 하나 생겼는데, 통유리 안으로 백발의 노인이 서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전에 SNS에서 본 할머니 카페 직원에 관한 글이 떠올라 유독 반가웠다.
제발 할머니 알바 안 하셨으면 좋겠어라는 제목을 단 사연의 요지는 이랬다. 자주 가는 카페에 할머니 직원이 있는데, 음료의 재료 양이 매번 조금씩 다르고 기프티콘 결제 방법을 몰라 헤매느라 바쁜 아침 시간을 까먹었고, 그래서 본사에 클레임을 걸어둔 상태라는 글이었다. 해당 글을 캡처해서 올린 SNS 댓글에는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다, 노인이라고 해서 참아줄 수는 없다 등 글쓴이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노인 혐오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에 있는 할머니를 '젊은 여자'나 '어린 학생'이라는 워딩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그래도 괜찮다고 여겨질까. 카페나 식당을 이용할 때 일에 아직 미숙해 실수가 잦고 허둥지둥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마주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경력과 관계없이 일머리가 없어 좀처럼 늘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다. 태도의 문제가 아닌 이상, 이럴 때 대부분의 소비자는 자신의 사회 초년 시절(혹은 곧 다가올 미래)을 떠올리며 이해심을 발휘할 것이다. 지적을 하더라도 특정 직원의 미숙함을 '그러니까 젊은 여자는 안 썼으면 좋겠어' '어린 학생이라서 일을 못해'라고 얘기한다면 일반화로 지적받겠지. 그런데 우리는 노년인 사람을 일반화하고 퉁치는 데는 왜 이다지도 관대할까.
물론 신체와 뇌가 노화하면서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더 덜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쉽지 않고, 복잡한 매뉴얼을 종종 잊고, 동작이 느려 서빙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불편함과 느림조차 기다려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30년 후, 50년 후의 나는 과연 무사할까. 미친 생산성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사회, 그래서 빠릿빠릿하게 최대치로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쓸모없다고 여기며 간편하게 배제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결국 부품 이상의 가치로 취급받지 못한다. 진짜 문제는 오로지 생산성과 효율을 기준으로 돌아가고 바뀌는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과 가치일텐데, 눈앞의 개인을 탓하기는 너무나 쉽고 간편하다.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일본과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젊은 사람도 많이 이용하는 카페, 레스토랑에서 백발의 노인이 일하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노년, 장애인처럼 더딘 몸들을 젊은 세대의 공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에서 온 나는 그만 그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모습이 한국사회에서도 자연스러워질 수는 없을까? 불안한 미래와 각박한 현재를 견디느라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안된다는 계산기를 손에 꼭 쥐고 산다는 걸 알지만,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결국, 늙는다는 공평하고도 자명한 인생의 진실을. 그리고 지금 사회가 노년을 대하는 태도가 곧 미래에 우리가 겪을 현실임을. 공동체의 환대와 이해가 있는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노후준비는 적당한 '그러려니' 정신이 아닐까.
박의나
프리랜스 에디터이자 라이터. 독립잡지 '나이이즘'을 발행하며, 에디터 세계 안내서 '근데 에디터는 무슨 일 해요?'를 펴냈다. 콘텐츠 기획, 집필, 인터뷰 등 콘텐츠를 만드고 편집하는 다양한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