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15년 전 서슬 퍼런 내 눈앞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15살이었던 나는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그 슬픔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장례식장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내 어깨를 부여잡고 우는 모습이 싫었고, 한순간에 집이라는 곳이 가장 불편한 장소가 된 것이 싫었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성장시켰다. 그렇게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 이별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은 마치 강을 다스리는 일과 같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도, 메말라 있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걷잡을 수 없이 넘쳐흘러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며, 스스로 마음의 둑을 쌓아 가둬놓기도 한다.
태어나서 딱 한번,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슬픔과 위로가 섞여 붙들린 감정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못했다. <아주 긴 변명>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남자는, 아내가 사고로 죽는 날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오히려 언론을 통해서 본인의 배경을 극적으로 만드는 데 사용했다. 내연녀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본인은 담담히 내연녀를 원했다. 반면에 같은 사고를 당해 떠난 아내 친구의 남편과 아이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겪는다. 주인공은 알 수 없는 감정과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생판 남이었던 아내 친구네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한다. 그리고 똑같이 가족을 잃었지만 '아내'를 잃은 주인공과,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색다른 동거는 별 다를 것 없이 계속된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던 일상 속에서 어느 날, 주인공은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눈물이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반성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를 잃고 수개월이 흘렀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뭔가를 터트린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아이들을 통해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언가를 느꼈다.
이별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40대 중반의 남자가 8살 배기 아이들과 그저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게 전부였다.
엄마와 아내의 부재에 대해 슬퍼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드러내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그저 각자 감내하고 함께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기록을 쓰고자했다. 언제고 내 서랍이 열릴지는 모르는 노릇이지만, 7개월 전에 써놓았던 서두를 그냥 인터넷 벌판에 던지는 것이 아주 작은 위안이 된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나약함을 느낀다.
죽음이 드리우는 과정과, 내 기억 속의 당신을 글로써 멀게 소리치려고 한다. 책 제목처럼, 당신을 기억하기 위한 어떤 것이라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아주 긴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나름대로 지금의 고민과 다가올 슬픔에 대한, 나름 간절한 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