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금요일, 아주 맑고 화창한 날씨. 이날은 졸업한 학교에서, 취업 관련 설명회가 있었고 나는 휴가를 쓰고 회사를 소개하러 학교에 갔었다. 간 김에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후배 둘을 이른 아침부터 만나 커피를 한잔 하고, 밥을 먹었다. 거짓말처럼 식사를 다 마치고 담배를 한대 태우고 있던 와중에 이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동생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동생은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바로 서울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후배들에게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하고 차에 올라탔다. 금요일 점심은 온 도로에 차가 많았고 기차표도 구하기 힘들었다. 나는 택시에서 가족, 회사,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면서 상황을 계속 지켜봤고 기사님은 내 상황을 눈치채고는 수서역으로 가겠다고 했다. 표가 없다는 내 말에 오히려 역정을 내시며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무 기차나 올라타야지라고 소리치셨다. 택시비도 받지 않으셨다. 너무나 큰 호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감사하다는 말을 열 번은 하고는 곧장 수서역에서 기차를 잡아 그대로 올라탔다.
장례식 준비는 정말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현실을 느낄 새도 없이 이것저것 챙겨야 했고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동생이 대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준비는 끝났고, 갑자기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동생이 상복을 갖춰 입고 올라와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 나란히 앉았다. 동생은 엄마의 핸드폰으로 대구로 내려오는 길 내내 계속 부고 문자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장 먼저 온 손님들은 외할머니의 성당분들이었다. 나는 손님으로 온 성당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말이 적힌 가사집을 들고, 내 부분을 따라 읽어야 했다. 머리를 비워버리고는.
우리 엄마의 빈소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3일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주셨다. 특히,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친구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정말 수많은 친구들이 3일 내내 있어주었고, 장지까지 따라와 주었다. 아무런 대가나 바람 없이 그 자리에서 함께 해주었고 모두들 덕분에 장례식은 잘 치러낼 수 있었다. 모두가 이야기해주셨다. 너희 엄마가 이런 모습을 보면 좋아할 것이라고, 너희 너무 잘 살았다고.
입관식과, 할머니의 바람으로 치른 장례 미사가 가장 큰 고비였지만 떠나가는 엄마를 마주할 때 우리는 손을 부여잡고 서로를 의지했고, 장례 미사에서 터져버리고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친구들이 함께해주었다. 모든 장례가 끝나고 우리는 엄마를 아빠 옆에 나란히 묻어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형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등을 지고 걸었다. 잠시 후 동생이 먼발치에서 흐느끼는 것을 보고 나는 그대로 달려가 동생을 끌어안고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생은 나에게 물었다. 아빠를 용서하냐고.
나는 이제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도 탓하고 싶은 마음이었나 보다.
2022.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