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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리 Aug 13. 2022

쓰는 하루를 위하여_일기장의 추억

리시의 다이어리


퇴사  아이와 그림책을 보는 시간이 많아질 무렵, 그땐 아이들에게 그림책과 동화책 수업을 하는 40 중반의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직장 생활엔  의미를 찾을  없었고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안에 어떤 씨앗이 있을지, 무얼 키워 나가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무모한 직관이기도 했다. 용기 이기도 했고 회피일 수도 있는 퇴사였다. 그로 인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주다 어느 순간 아이보다 내가 그림책에 빠져들던 경험은 자꾸만 이런 저런 책을 사들이고 그림책 모임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실에도 다니고 그림 모임이나 그림책 모임, 동화책 모임 등 좋아하는 것을 실컷 하다가 쓰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쓰는 일은 몸에 습관이 베어야 하는 꽤나 성실함을 요구하는 종목이라 마음처럼 쉽게 되진 않았다.


그런데 문득 유년시절의 학예발표회가 떠올랐다. 3학년 열살의 나는 일기를 매일 썼었고 쓰는 일이 어렵지 않은 어린이였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이 자꾸 칭찬해주니 허세를 잔뜩 부려볼 요량으로 다 쓴 일기장을 테이프로 이어 붙여 두꺼운 일기장을 들고 다녔다. 담임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주는 날, 두툼한 일기장을 들어올려 아이들 앞에서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학예발표회로 일기장 낭독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무대공포증이 없던 천진난만한 시절이라 반짝이는 풀빛 니뜨 옷을 입고 반 대표로 마음에 들던 일기 세 편을 골라 강당 무대에 올랐다. 내가 읽었던 첫번째 일기는 멜로디언을 새로 샀던 날의 일기였다. 음악 시간 준비물로 챙겨 두었다가 그것을 놓고 온 날, 너무 속상했던 그 때 멜로디언을 갖다 주신 엄마에 대해 쓴 글이었다. 두번째, 세번째 일기는 뭐였을까? 아쉽게도 몇차례 이사를 하면서 일기장을 잃어버려 다시 들춰볼 수 없지만, 쓰는 일이 버거운 날, 쓰는 게 아무렇지 않던 그 시절을 기억하면 왠지 모를 힘이 나는 것 같아 그 날을 자꾸 떠올려본다.


일기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열살의 나를 어른이 되어 조금 더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속상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내 아이가 쓰고 그린 것은 커다란 박스에 모아두는 습관이 있다. 창문에 붙여 둔 그림들도 떼어내면 뒷부분에 테이프 자국이 있지만 조심조심 떼어내 박스에 모두 넣어둔다. 리아는 꽤 자주 일기장을 펼치고 A4 종이 가득 이야기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방학 숙제를 내주시지 않는 담임 선생님을 만났지만 거의 매일 쓰는 방학을 보내고 있다. 일기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일기의 효용과 가치를 말해주기 좋은 그림책으로 “리시의 다이어리”를 추천한다.



통통하게 볼살이 차오른 듯한 금발 머리 소녀가 노트와 꽃을 들고 가는 옆 모습이 보인다. 어떤 신나는 일이 있을까? 바로 할머니의 생일, 리시는 할머니께 꽃과 노트를 선물한다. 할머니는 좋아하는 꽃과 근사한 일기장이라며 기뻐하시지만 리시는 막상 일기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리시가 궁금해하자 할머니는 작은 책장에서 자신의 오랜 일기장 하나를 꺼내 온다.


할머니가 일기를 읽어 주시자 얼음이 꽁꽁 언 추운 날, 스케이트를 타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책 속의 책,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다.

얼음이 살짝 녹아 있는 좁은 공간에 오리 한 마리가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면 살짝 아찔한데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는 눈에 띈 막대기 하나를 주워 툭툭툭.. 오리 주변의 얼음들을 조심조심 깬다. 어느새 얌전해진 오리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얼음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리시가 재미있어 하며 또다른 이야기를 재촉하자 이제 할머니의 두번째 일기가 펼쳐진다. 학교가 끝나고 엄마에게 줄 들꽃을 꺾어 예쁜 꽃병을 찾았는데 부엌 선반 위 꽃병을 내리려다 흔들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한쪽 귀퉁이만 조금 깨져 있어 최선을 다해 조각을 붙인다. 꽃병이 깨지는 부분에서 함께 마음을 졸이던 리시는 두번째 일기를 듣고 나서 이야기 속의 아이 이름을 묻자 할머니는 ‘리시’라고 알려준다. 리시의 이름은 할머니에게서 따온 것이었고 일기장 속의 여자 아이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리시는 자신도 일기를 써 보고 싶다고 진짜 재밌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오랜 시절 할머니의 일상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다가오다니 리시에게 일기쓰기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을까.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 글 한 편이 나를 그 때 그 곳으로 데려가주는 것처럼 하루를 기록한 일기는 세월이 흘러도 그 때의 어린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일기가 아니었다면 리시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생생하게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일기를 들으며 함께 공명했던 그 소중한 경험은 책의 말미에 리시가 할머니와 일기장을 고르고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이어진다.



내가 보낸 오늘은 가장 나 다운 하루였을 것이다. 그 오늘과 오늘의 기록이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 내일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늘도 지금의 생각 하나를 남겨보자고 다독여본다.

스탠드를 켜고 이제 일기장을 펼 시간이다.




리시의 다이어리 | 엘런 델랑어 글 | 일라리아 차넬라토 그림 | 김영진 옮김 | 주니어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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