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냉소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가족 공동체의 해체 혹은 파편화일 것이다. 과거에 조부모를 시작으로 부모, 형제나 자매, 여기에 더해 일가친척들까지 한 집에 모여 ‘완성된’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과 지금은 사뭇 다르다. 조부모 가정이랄지, 편부모 가정이랄지, 심지어 독신 가구랄지, 가족의 형태는 다양한 상태로 분화되었으며 적어도 현세대는 오히려 이러한 가족의 형태에 익숙해져 있을 테다.
<남매의 여름밤>은 이런 연유에서 어찌 보면 전형적인 현대 가족의 형태다. 사정이 생겨 옥주와 동주, 리고 아버지는 홀로 사는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고 고모 역시 남편과의 다툼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온다. 이 과정 속에서 할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되고 영화는 옥주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이끌어 간다.
아마 이 영화가 누군가의 심금을 울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영화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그것에서 기인하는 노스탤지어 때문일 테다. 옥주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제시되는 ‘완성된’ 형태의 가족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서 갈등을 겪더라도, 이 가족의 결속이나 정情은 완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가족의 형태가 어떻게 형성됐든 그 형식에서 기인하는 불안함이나 갈등 따위는 살펴볼 수 없다. 오히려 감독은 이러한 형식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에둘러 읊조린다. 예컨대, 옥주와 동주의 엄마가 어째서 그들을 떠났는지, 고모가 어째서 남편과의 갈등이 깊어졌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간접적으로 제시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시절을 영화에 투영하여 우리네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우리네 가족은 어떤 정서를 품고 있었는지, 그것은 아마 옥주의 가족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속삭인다.
윤단비 감독이 밝혔듯,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다지 극적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다만 일상 속에서 벌어질 법한 사건들을 느슨하게, 하지만 허술하지 않게 제시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서 온다. 이 허술하지 않은 느슨함, 그리고 영화 자체가 품고 있는 온기 덕분에 관객들의 몰입은 여타 영화보다 강렬하게 일어난다. 관객들이 품고 있던 각자의 세계가 영화 속으로 침투할 여지를 충분히 만들어 준다. 그 세계가 침투하는 순간, 관객들 마음에 잠재되어있던 노스탤지어가 일어나 진한 정서적 여운을 남길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옥주 혹은 동주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 ‘현대 한국적’ 가족 서사의 포문을 연 윤단비 감독의 귀추가 주목된다.